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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부모와 떨어져 살던 여섯 살 때, 할머니를 따라 동네 사진관에서 누나와 찍은 사진. 무척 긴장한 표정으로 주먹을 쥐고 정면을 보지 못하고 있는 소년이 바로 나다.
나는 서울 강북구 도봉로에 있는 영훈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교직 경력은 27년째. ‘울며 기도하는 교사’라는 뜻으로 ‘울보선생’이란 별명을 갖고 있다.
아이들을 좋아해 선생님이 됐다. 국어를 좋아하는 소년이었고 글 쓰는 작가가 되길 원했다. 결국 1998년 시인으로 등단했다. 지금까지 4권의 시집을 포함해 총 17권의 책을 썼다.
초임교사 시절만 해도 신앙이 없었다.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 것은 아내 덕분이다. 서울 대방동에 있는 이전 학교에서 3년 남짓 교사생활을 할 무렵 아내를 만났다. 아내는 영어교사로 부임해 왔다. 학교에 온 지 3개월 만에 눈이 맞았고 데이트 7개월 만에 결혼에 골인했다. 내 나이 29세, 아내는 24세였다.
처가는 5대째 믿음의 집안이었다. 나중에 목사님이 되신 장모님은 당시 전도사였다. 현재 목포남부교회 담임목사인 둘째 처남은 신학생이었다.
나는 충남 공주가 고향인데, 우리 가정은 대대로 술을 엄청 많이 먹는 집안이었다. 할아버지 5형제가 술 때문에 돌아가셨다. 할머니들도 팔자타령을 하며 술을 많이 드셨다. 결국 술을 드시다 돌아가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외아들로 내성적인 분이었다. 술만 드시면 말이 많아지는 그런 분이었다. 19세에 결혼을 하셨는데, 어머니가 시집온 첫날 할머니로부터 심한 말을 들었다고 한다. “하나밖에 없는 내 아들을 네가 빼앗아 갔어.”
어머니는 할머니와 함께 살 수 없었다. 결국 우리 4남매도 떨어져 지냈다. 나와 누나는 영문도 모른 채 서울 길음동에서 할아버지 할머니 손에 컸다. 여동생과 남동생은 부모와 서울 삼양동 빨래골에서 살았다.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였을까. 나는 무척 소심한 아이로 자랐다.
한 번은 학교에서 인성검사를 받은 적이 있는데, 남자다운 성격이 100% 중 5%로 나왔다. 특기는 고무줄 줄넘기 공기놀이였다. 별명은 ‘색시’였다. 얼굴이 하얗고 창백한,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는 아이가 바로 나였다.
아버지가 미웠다. 가끔씩 할아버지 할머니 집에 술을 잔뜩 드시고 오는 아버지를 보며 ‘저 아저씨는 누군가’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희한한 것은 그 싫어하는 아버지를 내가 커가면서 닮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외모가 많이 닮았다. 아버지처럼 이마가 넓었고 목소리도 닮았다. 언젠가 가족과 노래방을 갔는데 여동생이 외쳤다. “오빠, 오빠는 노래할 때 아버지랑 목소리가 똑같아.”
그날 잡고 있던 마이크를 던져버렸다. 며칠 뒤 거울을 보는데 아뿔싸 내가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아버지가 서 있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아버지를 닮은 것은 그놈의 몹쓸 술이었다. 엄청 술을 마셨다. 혼자 두세 병을 마셨는데도 다음날 정신이 맑았다. 기분이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모태신앙으로 5대째 믿음의 집안인 아내는 술독에 빠져 살고 있는 나를 어떻게 남편감으로 찍었을까.
정리=유영대 기자 ydyoo@kmib.co.kr
◇약력 △1963년 충남 공주 출생 △동국대 국문과·교육대학원, 백석대 신학대학원 졸업 △유스코스타·두란노아버지학교 강사, 물댄동산수림교회 청소년부 담당목사△저서 ‘아버지파워’ ‘울보선생의 명품인생’ ‘마음 훔치기’ ‘영훈고 이야기’ ‘울보선생’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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