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 망친 딸에게
작성자
김*영
작성일
08.02.23
조회수
2161

시험 망친 딸에게―이철환

우리가 중시해야 할 성적향상이나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사교육에 찌든 우리에게 성공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동화작가 이철환씨의 글을 소개합니다.

큰 딸아이
중간고사 기간이었다. 내일이 시험인데 아이는 넋 놓고 텔레비전만 보고 있었다. 오후 내내 열심히 공부한 것 같아 아무 말 안 했다. 딸아이가
좋아하는 드라마가 끝났다. 텔레비전을 끄는 줄 알았는데 채널을 계속 돌리고 있었다. 어찌 하나 지켜 보았다. 아이는 텔레비전 앞에 계속 죽치고
있었다. 내친 김에 드라마 한 편 더 보려는 것 같았다.

엄마의 도끼눈을 아이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눈치도 없었다. 기가 막혀 말도
안 나왔다. 아이 엄마도 기가 막힌 눈빛이었다. 아이 엄마가 잔소릴 했다. 나도 한 마디 거들었다. 아이는 시험 공부 다 끝났다고 했다. 수학도
백점 받을 자신 있다고 했다. 걱정 말라고 했다. 어쩌겠는가. 시험공부 다 했다는데. 백점 받을 자신 있다는데 어쩌겠는가. 할 말이 없었다.


내 방으로 그냥 돌아왔다. 나는 그날 밤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딸아이가 내일 마지막 시험을 봅니다. 수학시험을 보는데
공부 별로 안했습니다. 시험 망치게 해주세요. 꼭 망치게 해주세요. 빵점 맞아도 좋습니다.” 간절히 기도했다. 진심이었다. 하나님은 내 기도를
들어주셨다. 다음 날, 아이는 수학시험을 쫄딱 망치고 눈물을 글썽이며 돌아왔다. 딸아이를 위로하고 싶었지만 나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기뻤다.
슬퍼도 기뻤다. 시험은 망했어도 삶의 이치를 배웠으니 됐다. 이빨 하나 빠졌어도 뿔 하나 생겼으니 됐다. 아플 땐 아파야 하니까. 아픔도 사람을
밀고 가니까.

그날 밤, 딸에게 편지를 썼다. ‘사랑하는 딸, 마음 아파하지 마라. 반달은 다시 보름달 된다. 언젠가 네가 아빠에게
성공이 뭐냐고 물었었잖아. 아빠 생각을 말해줄게.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성공 아니다. 높은 지위를 얻는 것이 성공 아니다. 돈 많이
벌어 부자 되는 것이 성공 아니다. 좋은 대학 나오는 것이 성공 아니다. 좋은 사람 되는 것이 성공이다. 가족들에게, 친구들에게, 함께 일하는
동료들에게 성실함을 인정받는 것이 성공이다. 진실함을 인정받는 것이 성공이다. 아빠 생각은 그렇다. 네 생각은 다를 수
있다.’

편지를 써 놓고 미안했다. 꿈이 많은 아이에게 어른의 생각을 너무 분명히 말한 것 같았다. 편지 내용을 고칠 수도 없었다.
내 생각은 분명히 그랬으니까. 미안한 마음이 들어 편지 끝에 노오란 양지꽃을 붙여 주었다. 봄날 앞산에서 채집해 말려 놓은 꽃이었다. 양지꽃
아래 원고료로 받은 만원짜리 한 장도 함께 붙여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