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현상의 다른 해석
한 교회에서 같이 시무했던 장로로서 역시 대학에서 문학과 미학을 강의하시던 李文九 장로께서 서울지역으로 이사가신 지도 수 년이 지났다. 그 분은 대학에서 정년 할 때 수상록 「아름다운 만남」(2001년)을 발간했다. 그 책 속에 함께 생각해보면 좋을만한 글 한 토막이 들어있기에 여기에 요약 소개한다.
대학에 다니는 어느 여학생이 비오는 밤에 시험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밤 11시쯤 되었을까 갑자기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평소의 지병이 다시 돋아난 것이다. 그런데 서랍을 열어보니 늘 준비해두었던 약이 다 떨어지고 없었다. 약을 다 먹고 미처 준비해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약을 먹지 않고 그냥 밤을 새울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약을 사러 갈 수도 없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다급한 나머지 안방에서 TV를 보고 있는 초등학교 3학년짜리 조카를 불렀다. 그리고는 “얘, 내가 지금 꼼작할 수 없이 아파서 그러는데 약 좀 사다줄래?” 하고 부탁했다. 그러자 조카는 아무런 이의 없이 고모를 위해 약이름을 쓴 쪽지와 오천원짜리 지폐를 받아 우산을 들고 약국으로 달려갔다. 가까운 동네 약국은 이미 문을 닫은 후여서 버스정류장이 있는 큰 길까지 달려가서 약을 사들고 돌아왔다. 그러자 여대생 고모는 삼천원짜리 약과 거스름돈 이천원을 내놓고 뒤돌아 나가려는 조카를 불렀다. 그리고 “너, 정말 고맙다. 자, 이 돈 심부름 값이다”하고 거스름돈을 모두 주었다. 조카는 한두 번 사양하다 돈을 받아들고 안방으로 들어가면서 “엄마, 나 고모한테 심부름값 이천원이나 받았어요”하면서 좋아했다.
이런 장면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하나의 사례다. 이제 이 상황을 조금 바꿔보기로 하자.
고모인 여대생이 한밤중에 아프기 시작했다. 그래서 역시 안방에서 TV를 보고 있는 조카를 불러서 심부름을 부탁했다. “얘야, 내가 꼼짝할 수 없이 아파서 그러는데 약 좀 사다줄래?” 그러자 조카는 “지금?”하고 반문했다. 지금이 몇 시인데 이밤중에 심부름을 시키느냐는 뜻이었다.
그래서 고모가 사정을 했다. “그래 미안하다. 내가 도저히 참을 수 없이 아픈데 움직일 수가 없어. 그러니까 네가 약좀 사다주렴?” 그러자 조카는 “지금 이 시간에는 약국 문 닫았어” 그래서 고모가 또 말한다. “그래 동네 약국 문 닫은 건 나도 아는데 버스정류장 앞에 큰 약방 하나 있잖니” 조카가 또 대답했다. “거기까지나?” 양심도 없지 지금 이 늦은 시간에 날 보고 거기까지 가서 약을 사오라는 말이냐는 불만의 뜻이었다.
“그래, 어떡하니 내가 꼼짝을 못 하겠으니 좀 부탁한다” 여대생 고모는 숫제 애원을 했다. 그러자 조카는 드디어 “지금 나 숙제 많아서 안 돼!”하고 냉정하게 돌아섰다. 분명히 TV를 보면서 히히덕거리다 온 녀석이 숙제 핑계대고 고모의 청을 거절하는 것이었다. 다급해진 고모가 조카를 다시 불렀다. “너 약 사오면 심부름 값 줄게” 그러자 귀가 번떡 뜨이는지 “얼마나?”하고 물었다. “천원 줄게!” “싫어” “그럼, 이천원 줄게” 그러자 “알았어 돈 내놔!” 했다. 드디어 이렇게 흥정을 마치고 나서야 조카는 약국에 가서 약을 사왔다.
그리고 거스름돈도 내놓지 않은 채 약만 휙 던져놓고 나갔다. 그런 조카에게 고모가 물었다. “너 거스름돈 안 받았니?” “받았지” “그런데 왜 안 내놔?” “아까 심부름 값으로 준댔잖아!”하고 당연한듯 으쓱거리며 방을 나갔다.
이런 모습도 우리 주변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조카가 고모의 긴급한 상황에 대해 심부름을 해줬고 둘 다 심부름 값으로 이천원을 받았다. 결과와 외형만 보면 두 이야기는 똑같아 보인다.
그러나 정말 이 두 장면이 똑같은 것인가? 그렇지 않다. 스스로 우러나오는 정과 의지로 어떤 행동, 발언, 처신을 하는 것과 “- 때문에” 계산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 것과는 그 질과 동기면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다.
신앙생활도 이런 경우가 적지 않게 있다. 체면 때문에 교회출석을 한다든지, 직분 때문에 절기헌금 액수를 늘인다든지 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내발적 동기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지 못하고 남의 시선을 생각하며 인색하게 계산하여 하는 일들이 있을 것이다. 이름하여 초보적 신앙이라고나 할까? 현상과 외모는 같은데 내용과 의미가 다른 경우들이 있다. 한 과부댁이 엽전 두렙돈 헌금하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은 가장 많이 헌금했다고 칭찬하셨다. 절대액수를 본 게 아니라 상대적 형편과 마음자세를 본 것이다. 현상으로 판단한 게 아니라 의미로 판단한 것이다.(눅 21:1-4)
오늘날도 즐겨내는 헌금엔 의미가 있고 사연이 있다. 땀과 눈물과 피가 어린 헌금이 있는 것이다. 목회자와 교회재정부에서는 이 의미를 살필 줄 알아야한다. 헌금을 안 바친 사람들은 괜찮았는데 헌금을 바치면서 부부가 함께 벌 받은 집안이 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이다(행 5:1-11) 바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하나님 뜻에 맞게 바치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목동이요, 막내아들로 집안 식구들 모임에도 참여하지 못하고 들판에서 형들의 양떼나 지키고 있던 다윗을 하나님의 눈이 보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들이 보는 방법과 다른 방법이라고 말씀하셨다.(삼상 16:7, 시34:18-19)
우리 눈에 숨겨진 것들을 볼 수 있도록 영적 시력을 회복해야겠다.(눅 19:42) 성전을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 보신 예수님과 돈 바꾸는 강도의 굴혈로 이해한 지도자들 사이에는 같은 성전, 다른 의미의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눅 19:45-46) 현상으로 보면 똑같은 두통 같은데 원인은 각각 다를 수 있다. 겉으로 보기엔 똑같은 메스꺼움인데 내용면으로 보면 여러 가지 이유로 갈린다. 따라서 세상을 볼 땐 현상만 보지 말고 의미도 보자. 사람을 볼 때 외모만 보지 말고 내면(신앙)도 보자. 친구와 배우자를 고를 때 새로운 직원이나 사원을 뽑을 때에 참고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