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는 거울이 발명되면서부터 불행해졌다고 한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눈이 밝아져 자신들의 모습을 보게 됐을 때 행복했는가? 불행했는가? 아무리 아는 게 병(識字憂患)이라지만 우리 자신의 모습을 정확히 진단해 보자. 오늘날 한국기독교계가 일반 국민에게 어떻게 보여 지고 있는지 알아보자.
대개의 스캔들은 남이 다 아는데 본인만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다. 등잔 밑이 어두우니까! 선수 바둑은 1단, 훈수 바둑은 2단이니까! 자기의 진면모를 모른 채 스스로 속으며 사는 것이다. 이제 한국의 교회(기독교)에 대해 젊은이들은 어떤 인식을 갖고 있는가? 폭넓은 전도 활동을 위해 우리들의 실상을 정확히 들어보자.
어디서 오해를 받고 있는가? 왜 젊은이들이 교회를 기피하는가? 하나님이 정말 존재하는지? 실증주의에 길들여진 소위 싸구려 과학주의는 매사 증거를 요구한다. 하나님을 보았느냐고 묻는다. 한낮의 태양도 두 눈으로 직접보지 못하는데, 그 눈으로 하나님을 보고 싶어 한다. 증조할아버지를 본적이 없다는 이유로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못 자국을 보여 달라는 도마에게 예수님은 책망대신 실제 못자국과 창자국을 보여 주었다.안 믿는 사람들은 교회의 분쟁이나 종파 간 힘겨루기에 대해 혐오감을 느낀다. “내 탓이오”하고 양보하는 것보다 “믿는 사람들은 군병 같으니... 원수마귀 모두 쫓겨가기는...”을 합창하며 전투에 임하는 모습을 더 자주 보기 때문이다 .
이중인격자들이 많아 교회가 싫어졌다고 한다. 교회에서의 얼굴과 사회에서의 얼굴이 전혀 달라 환멸을 느낀다고 한다. 교회의 직분을 갖고 비양심적인 사회생활과 각종 비리 연루까지 가는 것을 보고 많은 비신자들은 “당신이나 잘해!”를 되뇌인다. 헌금 따라 사람대접이 달랐다. 하나님 앞에서 만인이 평등하다고 하지만 고액헌금자, 고관대작, 권력기관 재직자에 대해 너무 호의적인 모습에서 실망했다고 한다. “有錢有福, 無錢無福” 이어선 안된다는 말이다. 교회의 단순논리에 내 지적 사고력이 퇴보하고 있다.
교회에서 하는 얘기들은 너무 단순하다. 선과 악, 건전 아니면 퇴폐, 열심 대 나태, 사랑 아니면 저주라는 이분법적 논리뿐이다. 그러다 보니 내편, 네 편 등 정죄와 따돌림이 심해지는 것 같다. 교회안에는 진정으로 마음을 나눌만한 친구가 귀하다. 서로 상처를 주지 않으려는 배려 때문인지 솔직담백한 정공법이 아니라 우회적이고 겉만 나누는 만남 같다. 대충 덕담으로 들어서 좋은 얘기와 약간의 아부성 발언을 나누다 헤어진다. 이는 앙꼬 빠진 호빵 맛, 소금 빠진 김치 맛, 후추가루 빠진 곰탕 맛이 될 것이다. 행복이 있으면 번민도 있고 양지가 있으면 음지도 있는 것 아닌가? 교인들도 구름타고 다니면서 이슬만 먹고 사는 게 아닐진대 서로 속을 터놓고 답답한 일이나 실수한 것도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다.
교회에서 연애하는 것 많이 봤다. 좋아하는 이성을 찾고자 교회에 나오는 청년들이 있다는 것이다. 위선자라고 생각되어 교회 다니다 그만 두었단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이 말에 쉽게 동의하지 않을 것 같다 우리 주변에는 엉터리 목사와 사기꾼 목사 얘기를 한 두 편씩은 다 알고 있는 걸 보았다. 헛소문이길 바라지만 이는 전체 기독교인과 교회에 엄청난 피해를 주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 두 사건을 근거로 모집단 전체를 동일시하며 매도하는 경향도 있다. 교회를 개척한 후 교인 수에 따라 값을 매겨 목사들끼리 사고파는 일도 있다고 한다. 다방이나 미장원처럼 말이다. 이런 소문을 들을 때 마다 은연중에 교회가 내 맘속에서 멀어져가고 있다. 기독교인이면 행동거지 하나 하나까지 뭔가 달라야 한다는 과잉기대 때문에 교회에 가기 어렵다. 24시간 내내 모범생으로만 살수는 없지 않은가? 서양인들은 종교인도 자연스럽게, 평범하게 보아준다는데 우린 그럴 수 없나 교회경력 10년을 넘기다 보니 교회의 생리를 알 것 같다. 그런데 교회는 한마디로 너무 보수적, 폐쇄적, 이기적, 권위적 집단이다.
교회에서는 비판이 금기시되고 비판을 하면 사탄으로 매도되거나 이단으로 덮어 씌워지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중세의 로마 교회와 무엇이 다른가, 절(寺)싫으면 중(僧)이 떠나라는 식이다. 목회자에게 돈을 떼이고 나서 가톨릭 성당으로 개종한 사랑들이 종종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 이전에 목회자와의 관계, 교인들 상호간의 관계에서 상처와 손해가 없어야겠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좋은데 교회는 싫다는 것이다. 바울선생은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면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것 같이”란 선행단서를 붙였다. 이 단서가 없이 “나를 따르라”만 있어선 안된다. 많은 이단들이 바로 이 전제 없이 명령만 강요하니까 그 인간이 교주가 돼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젊은이들 중에는 “예수님은 좋다. 성경말씀도 좋다. 그러나 교회에 가서 그냥 나 혼자 예수님만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한다. 수원지에서 맑은 수돗물을 보냈건만 중간 파이프에서 녹이 슬어 최종소비자에겐 녹물이 나온다는 얘기다. 그러니 직접 수원지에 가서 물을 퍼 먹겠다는 얘기다.
내 능력 이상의 교회직분을 맡기려 해서 싫다. 교회 나간 지 겨우 1년쯤 됐는데 찬양대원을 하라고 하고 또 한편에서는 교회학교 교사도 하란다. 교회가 이렇게 부담스럽고 골치 아픈 곳인지 몰랐다. 이러다 교회 다니는 일조차 그만둘까 생각할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는다 지옥협박과 지나친 고립주의가 싫다. 교회는 세상의 소중한 가치들을 인정하지 않고 무시무시한 지옥 불구덩이로 협박하고 세상을 죄악의 소굴로 가르쳐 너무 고립시킨다. 가능한 빨리 죄악세상을 떠나는 것(죽음)이 최선인 것처럼 가르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