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에야 한류열풍이나 「대장금」 등 한국 드라마 덕분에 일본인들이 한국 요리의 심오함과 다채로움을 많이 알고 있지만 이전에는 한국요리 하면 단순히 ‘불고기’ 이미지밖에 없었다.
그런데 일본인의 한국 요리관을 크게 바꾸어 놓으면서 「食」으로 한·일간의 교량을 다시 만들어가는 한 기독 실업인이 있다. 한국에서 직송되는 식재료를 가지고 김치를 만들어 일본 전역에 20개의 음식점과 15개의 한국 식품점을 운영하며 600명의 사원을 거느린 회사로 키워낸 오영석 장로가 그 장본인이다.
최근엔 서울 청담동과 대구 현대백화점 8층에 <처가방> 1호, 2호점을 개설해 한국에서도 수준 높은 일식을 먹을 수 있게 하고 있다. 대구에서 얻어지는 영업 이익금은 100% 대구지역의 후진 교육과 기독교 선교에 사용하겠다는 그의 영업방침 또한 쉽지 않은 기독실업인의 귀감이다. 먼저 그에 대한 각 계 인사의 인물평을 들어보자.
①“몇 차례 위기가 있었으나 그 때마다 필요한 사람을 붙여 주심을 곁에서 똑똑히 보았다. 지금까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찾아 열심히 했던 하루 하루가 오늘의 오영석 장로님을 만들었다고 본다”(동경 다마 그리스도교회 명예목사 김중기)
②“오 사장은 신앙과 사업을 동시에 잘 해내는 훌륭한 사람이다. 일본 사업가들에게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대담한 사업전개. 당당한 체격에서 넘쳐나는 에너지와 사업적인 감각을 성공으로 이끄는 경영력에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일본중의원 8선 의원 도이 류이치)
③“찾아온 작은 기회를 사업으로 연결하여 오늘에 이른 입지전적인 그의 삶은 그저 찾아온 축복이 아니다. 밧단 아람에서 눈 붙일 겨를도 없이 힘을 다해 살았던 야곱처럼 불철주야 각고의 노력 끝에 이룬 성공이다”(한기총 회장/ 길자연 목사)
오영석 장로는 일본에서 ‘성공한 한국 외식기업’으로 손꼽히는 <처가방/妻家房>의 대표이다. 1952년생으로 대구시 동구 둔산동에서 자라난 그는 인생 초기에 화려한 시절을 보냈다. 공부보다는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을 더 좋아했던 그였다. 집안에서 귀한 장남으로 자라 돈 쓰는 법에 통달했던 그가 돈 버는 것에 재주를 부리기 시작한 것은 가세가 기울면서 닥친 생활고 때문이었다. 막노동에 춤 선생, 테이프 판매원 등으로 생활비를 벌며 일류 디자이너를 꿈꾸던 그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1983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문화복장학원(대학)에서 패션유통을 공부한 뒤 1987년 한국인 최초로 게이오 백화점에 취직하게 되어 여성복 코디네이터와 상품기획을 담당했다. 1989년 아들의 첫 돌 기념으로 백화점 사원들을 초대해 저녁을 대접하게 됐다. 부인 유향희 권사가 정성스럽게 김치와 제육보쌈, 잡채, 파전, 갈비찜 등 한국전통음식을 차렸다. 이날 잔치에 왔던 직원들이 그 음식을 다시 먹고 싶다며 백화점 안에 반찬가게를 열도록 요청하여 1993년 4월 도쿄 요츠야에 김치와 젓갈 등을 파는 반찬가게를 열게 된 게 <처가방>의 시작이었다.
그 뒤 1993. 9월에 게이오 백화점 안에 <처가방> 2호점이 생겼다. 유향희 권사는 전통 한국김치로 승부를 걸었다. 부안 곰소소금, 광천새우젓, 서산마늘, 청송과 고창 고추, 순창 고추장 등 한국에서 식재료를 직접 가져다 만들었다. 그 뒤 1998. 10. 26 김치박물관을 열어 김치의 유래와 원리를 이해시키고 각종 김치 샘플과 보존용 장독을 전시해놓고 김치 담그는 모습도 시연해 보였다.
그는 일본사람들에게 김치를 파는 데 그치지 않고 한국 문화를 알리고 있는 것이다. 격주로 토요일마다 김치교실을 열어 김치 만드는 법을 가르치기도 하고 아사히신문 등 언론매체를 통해 연재하기도 했다. 이미 김치교실의 역사도 13년이 되었다.
1996. 12 ‘한국 전통 가정음식점 처가방’을 열어 남편과 자녀에게 밥상을 차려주듯 한국음식을 공급하게 됐는데 일본 공영방송이 특별방송으로 소개한 뒤부터 하루 5-6만엔 매출되던 것이 100만엔 이상으로 매출이 올라 눈코 뜰 새 없이 확대 발전되기도 했다.
오영석 장로는 사업 원칙으로
①항상 자기 장점을 살린다
②기본을 쌓는 일이 중요하다
③고객 중심으로 생각한다
④사랑이 있어야한다
를 지키면서 사훈(社訓)으로 ‘사랑, 전통, 희망’을 내걸었다. 음식도 사랑으로 만들고, 손님도 사랑으로 대하고, 직원도 사랑으로 섬긴다는 것이다. 하나님 제일주의로 사는 오 장로는 록펠러를 인생 모델로 삼고 있다. 33세 때 백만장자가 되었고 43세 때 세계에서 제일 큰 회사를 소유했고 53세에 세계 최고 갑부가 된 록펠러는 그의 어머님의 가르침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 교훈은
“하나님을 친 아버지 이상으로 섬겨라. 목사님을 하나님 다음으로 섬겨라. 주일예배는 가급적 본 교회에서 드려라. 항상 십일조를 철저히 하라. 아무도 원수를 만들지 말라. 아침마다 목표를 세우고 기도 하라.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하루를 반성하며 기도하라. 아침에는 꼭 하나님 말씀을 읽어라. 남을 도울 수 있을 때 힘껏 도와라. 예배 시간에 항상 앞에 앉고 집중하여 예배 드려라.”
는 것이었다. 특히 십일조 생활을 위해 한 과부의 생활비 전액을 바친 일(막 12:44)을 기준으로 삼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 ‘돈’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다음 걸음을 뗄 수 없다. 그러나 일단 ‘돈’문제가 해결되면 영혼이 자유로와진다.
우리를 기뻐하시는 하나님께서 그 뒤를 책임져 주실 것이라 믿는 그는 현재 영남고교, 칼빈대, 한남대 등에 후진양성 장학금을 정기적으로 기부하고 있다. 한·일 외교와 한국문화해외전파, 지역복음화와 다음세대 장학사업 등으로 하나님의 동역자로 살고있다.
계속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장로(행 13:22)님이 되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