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서, 나부터
작성자
김*태
작성일
11.09.14
조회수
1673

중국 고전 중 「大學」이란 책이 있다. 그 안에 인간 삶의 수파식 원리가 나온다.

세계를 향하되 ‘여기서’부터 출발하고 미래를 보되 ‘지금’부터 살피라는 것이다.

그 말을 읽어보자. “사물을 연구한 뒤에야 알게 되고 (物格而后知至), 알게 된 후에야 뜻이 순일하게 되고 (知至而后意誠), 뜻이 순일하게 된 후에야 마음이 바르게 되고 (意誠而后心正), 마음이 바르게 된 뒤에야 몸이 닦아지고 (心正而后身修), 몸이 닦아진 뒤에야 집안이 다스려지고 (身修而后家齊), 집안이 다스려진 뒤에야 나라가 다스려지고 (家齊而后國治), 나라가 다스려진 후에야 천하가 평화롭게 된다(國治而后天下平).”

이것을 줄여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고 하는데 이는 1936년 협동정미소 창업으로 사업에 뛰어든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의 평생 좌우명이기도 하다. 국가 공동체의 기본단위인 가정이 올바로 서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周易」에 보면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우며, 형은 형답고, 아우는 아우다우며, 남편은 남편답고, 아내는 아내다우면 된다.” (父父子子, 兄兄弟弟, 夫夫婦婦, 而家道正).

이 말은 「論語」에도 나온다. “임금은 임금다와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와야 하고, 아버지는 아버지 다와야 하고, 자식은 자식 다와야 한다.” (君君臣臣 父父子子) 모든 사람은 자기 신분, 성별, 연령, 지위에 따른 본분과 책임이 있다. “-다와야 한다.” 나는 이것을 “-싶다”와 “-답다”로 구분하고 싶다. “want 지향성”과 “should 지향성”이라고나 할까? ‘먹고싶다, 입고싶다, 갖고싶다, 되고싶다’ 같이 원하는 것들이 있다. 욕구 추구형 인간은 이 “싶은 것”에 의해 동기화 되고 행동하게 된다. 그러나 좀 더 성숙한 사람이라면 유치한 자기지향성을 넘어서서 “남”도보고 너와 나를 합한 “우리”도 본다. ‘인간답다, 어른답다, 배운사람답다, 믿는사람답다’라는 수준을 생각해야 되는 것이다. 1인칭 단수인 “I”가 1인칭 복수대명사인 “We”나 2인칭 대명사인 “You”로 발전해야 되는 것이다.

옛날엔 길에서 마주치면 “먼저 가세요”(After you)라고 말했는데 요즘엔 “잠깐만요”라고 외치면서 헤짚고 밀치면서 앞서가려고 한다. 잘못된 것이다. 예수님이 디베랴 광야에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 5000명을 먹이신 기적을 신학적으로 해석해보면 신앙회복-사랑회복-경제회복이라 할 수 있는데 두번째 사랑회복 즉 사회질서와 관계회복(After you)이 선행되지 않았다면 세 번째의 먹는 문제 해결이 안됐을 것이다. 떡이 마련됐더라도 5000명이 동시에 먹으려고, 아니 남들보다 먼저 먹겠다고 덤볐다면 아마도 몇 십 명은 밟혀 죽었을지 모른다. 모두가 이웃과 옆 사람을 생각하며 “그 사람이 더 배고플거야. 라고 생각 하면서 양보하고 기다려주는 사회질서 회복이 있었기에 모두 먹고난 후 12광주리나 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절대량이 모자라서 굶어죽는 게 아니라 나누어먹는 분배기술이 서툴러서 굶게 되는 것이다.

흉년이 들면 어머니는 배곯아죽고 자식은 배 터져 죽는다는 말이 있다. 방 구들을 잘못 놓으면 아랫목에서 자는 사람은 데어서 죽고 웃목에서 자는 사람은 얼어서 죽는다고 한다. 공동선을 위해 서로 양보하고 이웃을 돌아보며 같이 사는 법을 더 배우고 더 가르쳐야 할 일이다. 자기관리로서의 수신(修身), 대인관계로서의 제가(齊家), 조직관리로서의 치국(治國), 인류관리로서의 평천하(平天下)처럼 물결이 번져나가는 수파식 인간행동수칙을 잘 지켜가야 되겠다.

「呂氏春秋」에 보면 “실패의 원인 중에서 자신을 알지 못했던 것보다 더 큰 일은 없다.”(敗莫大于不自知)는 말이 있다. Socrates의 “너 자신을 알라”(Know thyself)는 말이 서양 철학의 표어처럼 되어 있지만 동양 고전에도 역시 많은 사람이 언급한 지혜다.

“남을 이기려고 하는 자는 먼저 자기를 이겨야 하고(欲勝人者 必先自勝), 남을 따지려면 먼저 자신을 따져야 하며(欲論人者 必先自論), 남을 알고 싶으면 먼저 스스로를 알아야 한다.(欲知人者 必先自知)”는 것이다. 성경에도 “어찌하여 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작은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나무토막(대들보)은 보지 못하느냐?”(마 7:3-5, 눅 6:41-42)는 예수님의 교훈이 소개 되어 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보면 성공하고 실패하는 게 엄청난 일에서 좌우되지 않는다. 아주 사소한 일에서 갈라지거나 사소한 말들이 누적되어서 갈라진다. 대통령을 태운 비행기가 이륙했다가 급히 회항하는 사고가 났는데 조사해보니 아주 작은 나사 못 하나를 거꾸로 끼웠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KTX가 멈추어 서는 사고도 아주 작은 부속품 하나에 문제가 생겨 벌어지고 있다. 가장 작은 일이 가장 큰 사고를 일으킬 수 있는 시스템 사회가 되고 보니 모든 사람이 다 중요한 것이다. 외국인을 태우고 가는 택시기사는 그에게 대한민국 국민의 대표가 된다. 기사의 일거 일동을 갖고 그는 자기나라에 가서 우리나라 전체를 평가할 것이다. 올림픽 경기에 나간 선수 하나가 1등을 하면 곧 대한민국이 1등한 것이다. 그래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고 태극기가 가장 높은 곳에 게양되는 것이다. 그 순간 그 선수 하나가 곧 대한민국 전체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의 삶의 자세는 “나 하나쯤이야”가 아니라 “나 하나 만이라도”의 입장이어야 한다. 캠퍼스 안에 담배꽁초와 쓰레기가 하나도 없고, 대학생들이 무감독 시험으로 정직을 실천하며 시내버스 안에서 자리를 양보하고 만나면 먼저 웃으면서 인사하는 것이 별 것 아니라 생각하겠지만 이것이야 말로 별것인 것이다. 이런 일이 실천되면 그 대학은 성공하는 것이다. 자격보다 자세가 중요하다. 지금 여기서 나 하나의 언어, 생각, 행동이 바로 이 세상을 좌우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