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와 원로
작성자
김*태
작성일
11.08.01
조회수
1802

교회엔 장로들의 충언이 필요하고 국가엔 원로들의 제언이 중요하다. “元老一言重千金”이기 때문이다. ‘묵은 솔이 광솔’이란 말이있다. 노인의 지혜는 귀한 것이다. 연륜이 쌓인 것은 커다란 보배다. “시아버지 죽었다고 춤췄더니 왕골자리 떨어지니 생각나네. 시어머니 죽었다고 춤췄더니 보리방아 물 부어놓으니 생각나네”란 민간노래가 있었다. 당장 불편하게 간섭하고 시집살이 시키니까 싫어했지만 막상 안 계시니 그분들의 공로와 돌봄이 아쉽다는 후회 아닌가?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천륜(天倫)의 문제이기에 이론이나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예쁜 꽃은 자식이란 이름의 꽃이다. 사시사철 아름다움을 잃지 않고 세월이 흘러도 영원히 변색되지 않으며 퇴색하지 않는 향기를 가득 퍼지게 만드는 건 바로 자식이란 꽃이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그 사랑의 가장 보배로운 결실을 확인받을 수 있는 것은 자식이란 이름이 주는 편안하고 아늑한 행복감이다. 포크레인으로 퍼내도 마르지 않고 끝까지 바닥을 드러내지 않는 사랑의 샘물, 베풀고 베풀어도 닳지 않고 한 없이 가슴 속에 메아리치는 것이 바로 자식이다.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 존재의 처음과 마지막은 항상 자식인 것이다. 장로와 원로! 그들은 이 같은 자식을 기른 것만으로도 너무나 훌륭하다.

 

이제 젊은 자식들은 부모님과 이 같은 장로, 원로들을 위해 섬길 일을 다 해야겠다. 사랑하는 자식들을 모두 출가시키고 버팀목처럼 의지하던 배우자마저 하늘나라로 먼저 보낸 후에 깊은 병까지 얻어 거동조차 부자유한채 홀로 살아가시는 아버지, 어머니들이 우리 주변엔 허다하다. 늙고 병든 부모들을 보호시설에 위탁해놓고 자주 찾아뵙지도 않는 무심한 자식들의 모습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자화상이 아닌가싶다.

그나마 자식들에게 물려줄 재산이라도 있으면 재산을 기대하는 어리석은 자식들이 자선이나 베풀 듯 찾아오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자식에게 물려줄 재산도 없고 깊은 병에 치매까지 겹쳐 거동은커녕 사랑하는 자식들의 얼굴조차 알아보지 못하고 철부지 어린애처럼 살아가는 부모들을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늙고 병든 것도 서러운데 사랑으로 길렀던 자식들마저 외면한 채 버림받은 부모님들의 모습은 곧바로 가까운 미래에 우리 자신들이 겪을 모습이기도하다.

제 자식들은 몇 명 길러본 후에야 어렴풋이나마 자기가 받은 부모의 사랑과 희생을 짐작하는 것 같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때가 되면 부모님은 더 이상 이 세상에 계시지 않을 때가 되는 것이다. 부모님들은 천년 만년 살아계시지도 않거니와 사랑하는 자식들 곁에 머물러 있을 날도 길어야 몇 년밖에 되지 않으니 부모님 살아계실 때 효도를 다해야한다. 돌아가신 후에 부모님의 높고 큰 사랑이 그리워 가슴을 치고 후회해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때는 이미 늦어버렸는데 가슴에 커다란 멍을 품고 살게 될 것이다.

 

국가적으로도 원로, 장로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천 명의 부인을 거느린 솔로몬왕이 노년에 폭정을 하여 국민의 원성이 높았다.(왕상 11:1-13) 그가 죽은 후 아들 로호보암이 41세에 후계자가 되었다.(BC 931년) 당시 유다 족속과 북부, 동부 족속 간에 여러 갈등이 있어서 여로보암을 중심으로 한 반대파의 불만을 르호보암에게 하소연하였다. 그러나 르호보암은 부왕 솔로몬을 도왔던 원로들의 조언을 무시한 채 자기와 함께 자란 소장파 동료들의 충동적인 조언을 들었다. 이전보다 더 무거운 세금 부과와 엄벌을 포고했다. 그로 인해 12지파 중 10지파가 그에 대한 충성을 포기하고 돌아가 따로 북왕국을 세웠다. 원로와 장로들의 깊은 충고를 무시한 왕조는 분열 아니면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는 교훈을 주는 사례였다.

 

그 반대의 예도 있다. 세종대왕의 경우다. 아버지인 태종이 상왕으로 군사권과 인사권을 행사하는 가운데 2인자의 위치에 있는 세종은 고려에 대한 향수와 충성을 지키려는 신하들도 있고 주변의 신하들도 모두 20-30년씩 연상인 사람들이었다. 그가 왕위에 오른 1418년을 기준으로 볼 때 황희 정승은 세종보아 34세가 많은 56세였고 맹사성은 37세 많은 59세였다. 소장파라는 윤희도 17세 많은 39세였다. 22세의 왕이 노 대신들의 충고와 제안을 어떻게 들었을까? 세종은 그들에게 부지런히 묻고 경청했다.

 

수시로 노 대신들을 만나 국정에 도움이 되는 절실한 말을 들려달라고 주문했다. 토론과 제언 중 좋은 아이디어가 나오면 즉각 실천에 옮겨 신뢰를 쌓았다. 매달 5회 이상 경연(經筵)이라는 세미나식 국정 자문회의를 개최해 토론으로 중지를 모았다. 신하들의 무지가 드러나도 “무릇 배우는 자들은 스스로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그대들은 그 모르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말라”고 하며 다독였다. 종묘제사 때 이조판서 허조가 술잔을 들고 물러나오다 실족해 계단 아래로 굴렀는데도 급히 다가가 “허판서 다친 데는 없나?”라고 말해 경악을 금치 못하는 위기를 웃음으로 넘겨주었다.

 

원로와 장로들을 소중히 모시고 그들의 농익은 지혜나 충고를 귀담아 들었던 세종대왕은 성공한 리더였고 젊은 층의 펄펄 뛰는 선동적 조언에만 귀 기울였던 르호보암은 국가의 5/6를 잃었다. 이런 일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오늘날의 국정운영과 각종 기관 그리고 교회운영도 마찬가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