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람은 누구나 연변을 가면 용정을 방문하고 용정을 방문하면 윤동주 시인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일본 교또를 방문하게 될 때 마다 꼭 도지샤(同志社)대학을 찾게 된다. 그곳 교정 한쪽에 윤동주의 기념 시비와 옥천 출신 향수의 시인 정지용 시비가 나란히 서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유명한 대학 캠퍼스에서 우리나라 두 시인의 시비를 함께 보는 것도 특별한 감회의 순간이었다. 물론 서울의 연세대학교 교정에도 윤동주의 시비가 있다.
신세원 목사님의 교회이야기(2011. 2. 9)는 기독교시인 윤동주에 관해 소개하고 있다.
저항과 지조의 기독교 시인 윤동주(尹東柱/1917. 12. 30-1945. 2. 16)는 중국 길림성 화룡현(지금의 용정시) 명동촌(明洞村)에서 부친 윤영석(尹永錫)씨와 「맹자」를 만 번 이상 읽은 유학자이면서 민족운동가의 김약연(金躍淵) 목사의 여동생인 모친 김용 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 이름은 윤해환(尹海煥)이었다.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명동촌의 정신적인 터전은 철저한 민족주의와 기독교신앙이었다. 그는 명동소학교와 용정의 은진중학교를 나왔다. 평양 숭실학교와 광명중학교를 거쳐 1938년 연회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문과에 입학하여 영문학을 전공했고 1942년 졸업과 동시에 일본에 유학하여 도쿄의 릿쿄(立敎)대학 영문학과에 입학했다가 그 해 가을 교토의 도지샤(同志社)대학으로 적을 옮겼다. 이듬해 여름방학을 맞아 귀향길에 오르던 중 항일민족 사상범으로 몰려 체포되었고 옥고를 치르다가 1945. 2. 16 규슈(九州)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28세의 젊은 나이로 옥사하였다.
유학생 중심의 민족운동 비밀결사모의가 죄목이었고 옥사에 대한 의문이 아직도 남아있다. 중학교 시절부터 습작생활을 해왔고 연희전문 재학 때부터 민족의 고난을 불멸의 기독교적 희망으로 승화시킨 아름다운 시를 남겼다. 명동의 민족애라는 용광로 속에서 겨레의 정신과 기독교 신앙을 녹여서 찍어낸 최고의 작품들이 윤동주의 작품들이다.
그가 죽은 지 10년 뒤인 1955년에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출판되었으며 우리나라 청소년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시인 중의 하나로 자리매김 되었다. 윤동주 시인의 시어에는 밤하늘의 정경과 함께 별과 바람 같은 것들이 많다. 연변지역의 밤하늘에 뭇 별들이 쏟아져 내리는 야경이 있고 겨울의 달밤이 그처럼 맑고 은은하며 동지섣달 휘몰아치는 삭풍의 매운 맛을 뼈를 에는 듯이 차갑다. 이런 것들을 경험한 후에야 윤동주의 시어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①“죽는 날 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거러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스치운다”(「서시」1941. 11. 20)
②“세상으로부터 돌아오듯이 이제 내 좁은 방에 불을 끕니다. 불을 켜두는 것은 너무나 피로롭은 일이옵니다. 그것은 나의 연장이옵기에-/ 이제 창을 열어 공기를 바꾸어 들여야 할텐데 밖을 가만히 내다보아야 방안과 같이 어두워 꼭 세상 같은데 비를 맞고 오던 길이 그대로 비속에 젖어있사옵니다/ 하루의 울분을 씻을 바 없어 가만히 눈을 감으면 마음속으로 흐르는 소리, 이제 사상이 능금처럼 저절로 익어가옵니다”(「돌아와 보는 밤」1941. 6)
③“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래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되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새로운 길」1938. 5. 10)
④“다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검은 옷을 입히시오// 다들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흰 옷을 입히시오// 그리고 한 침실에/ 가지런히 잠을 재우시오// 다들 울거들랑/ 젖을 먹이시오// 이제 새벽이 오면/ 나팔소리 들려올거외다”(「새벽이 올 때까지」1941. 5)
⑤“쫓아오던 해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였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십자가」)1941. 5. 31)
⑥“봄이 혈관 속에 시내처럼 흘러/ 돌, 돌, 시내 차가운 언덕에/ 개나리, 진달래, 노오란 배추꽃// 삼동을 찾아온 나는/ 풀포기처럼 피어난다// 즐거운 종달새야/ 어느 이랑에서나 즐거웁게 솟쳐라// 푸르른 하늘은/ 아른아른 높기도 한데…”(「봄」동경에서 서울에 있는 강처중에게 편지와 함께 보낸 것)
1944. 2. 22 윤동주는 일본 법원에 기소되고 3. 31 독립운동을 했다는 죄목으로 2년형을 언도 받고 규슈 후꾸오까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수감 중에도 고향집에 부탁해 차입된 「신약성서」를 읽었다. 투옥 중 매달 일어로 쓴 엽서 한 장씩만 고향집에 보낼 수 있었는데 1945년엔 2월 중순까지 편지가 오지 않다가 “2월 16일 동주 사망 시체를 가져가라”는 전보가 도착하여 옥사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국권을 상실하고 생각과 언어와 행동의 제약을 받던 시절을 몸과 마음의 곤고한 삶 속에서도 조국의 해방을 그리워하며 “죽는 날 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다짐했던 민족시인 윤동주의 마음과 삶이 다시금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