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敎臣선생의 교육입국
작성자
김*태
작성일
11.05.09
조회수
1848

신앙지도자와 교육지도자가 뜻을 맞춰 합력하면 30, 40년 뒤의 국가 흥망성쇠를 바꿀 수 있다. 학교 급별에 따라 다르겠지만 초등학교 1학년(6세)을 가르쳐도 그가 46세가 되면 할 일은 다 할 수 있는 나이가 된다.
가장 확실한 미래 계획과 미래 기업은 교육사업인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자기사명을 ‘쇠파리’에 비유했다. 왜냐면 비대하여 졸고 있는 늙은 군마(軍馬)로 변한 아데네를 톡톡 쏴서 각성시켜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아데네 청년들을 잘못 인도해 새로운 신을 믿게 만든다는 오해를 받아 목숨을 잃고 말았다. 노평구 선생은 일제 강점기에 이승만은 외교입국, 김구는 살신입국, 김성수는 경제입국, 안창호는 교육입국, 김교신은 도덕입국에 헌신 했다고 규정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이 김교신(金敎臣) 선생을 참 교육자로 기억하고 있다. 왜 그럴까?
金敎臣 선생은
1.늘 한국 대형지도를 벽에다 걸어놓고 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2.댁에 계실 땐 한옥 모시적삼이나 두루마기에 짚신을 잘 신었다.
3.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는 심청전에도 자주 눈물을 흘렸으며 눈물 말은 밥은 물 말은 밥보다 소화가 더 잘된다고 말했다.
4.평생에 자전거를 애용했고 「성서조선」이 발행되면 서점은 물론 가까운 독자들에게도 자전거로 손수 배달하였다.
5.그때만 해도 인적이 드문 정릉 골짜기 외딴 곳에 주택과 서재를 마련하고 새벽마다 계곡에서 냉수마찰을 하고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 자주 기도하였다.
6.하루는 숙직당번 날 친구와 바둑을 몇 판 두고 나서 시간을 낭비한 자책으로 방성대곡 하였다.
7.연회에 나가면 술은 안 마시고 안주만 많이 들고 먼저 일어나 집에 돌아와 밤새며 공부하였다.
8.한번은 일본 경찰이 선생을 괴롭히려고 갖고 온 술을 끝까지 마셔 그 경찰을 녹초 되게 했는데도 선생은 끄떡없이 견디어 냈다 한다.
9.선생은 기운이 장사여서 씨름도 잘 했는데 특히 팔씨름이 유명해서 함흥질소회사에 있을 때 함경남도 일대에서 이름난 역사를 애기 팔 꺾듯이 했고, 또 선생은 사람을 한번 때리면 죽을까봐 못 때린다고 말했다.
10.선생은 손기정 선수의 마라톤 코우치도 맡았는데 일본내 예선에서 손기정 선수를 우승시켰을 때 중간점을 돌아서면서부터는 선생의 얼굴에 눈물이 끝없이 흐르고 손 선수는 선생의 이 눈물젖은 얼굴만 보면서 뛰었다고 한다.
11.성격이 불과 같고 또 사리, 흑백, 정사(正邪)를 분명히 했기 때문에 양정중학교에서 선생의 별명이 “양칼”이었다고 한다.
12.선생이 경기중학 교사로 부임한 것은 교장의 회유책이 있어서인가 하고 생각하는 이가 있지만 선생은 거기서도 역시 우리말(일본말을 쓰지않고)로만 수업을 하였으며 식민지 관료를 희망하는 수재 학생들을 늘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한다. 특히 하루는 백지도에 채색을 해보는 숙제를 받은 한 학생이 긁적긁적하여 성의 없이 한 숙제를 제출하자 선생은 전신으로 그의 위를 덮쳐 교탁까지 넘어진 일이 있었다 한다.
13.경기중학교에 재직시절 중국 지리를 가르치면서 선생이 제갈공명의 출사표를 눈물로 암송하고 학생들에게도 함께 암송시켰다고 한다.
14.어머님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학생들 앞에서 어린 시절 어머님께 거짓말한 것을 뉘우치며 울기도 하였다.
15.학벌이 없으신 부인과 사시는 동안 한 번도 싸운 적이 없고 큰소리 한번 낸 적이 없다 한다.
16.정릉댁에서 대체로 성서강의가 계속됐는데 어떤 때는 한 사람만 놓고 강의하는 때도 있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유명한 안과의사 손정균 박사도 이에 참가한 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이런 때도 선생은 학생 앞에 단정히 앉아 열심히 강의를 했는데 오히려 혼자 수강하는 학생이 졸고 있는 때가 있었다 한다.
17.선생은 늘 사표를 써서 가슴에 품고 다녔다 한다.
교육은 흐르는 물에 붓으로 글씨를 쓰는 것 같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라도 교사는 바위 위에다 끌로 글자를 아로새기듯 해야 한다고 어느 교육학자가 말했다 한다.
소크라테스는 아데네 청소년들을 가르치되 스스로 깨우치게 하기 위해 산파법이란 대화의 방법을 사용했다. 그러나 위정자들은 오히려 그가 청소년들을 선동하고 미망으로 이끈다는 죄목을 씌워 독배를 마시게 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플라톤 같은 제자를 길렀으니 성공한 교육자라 할 수 있다.
플라톤의 세 가지 자랑을 들어보자.
1.남성으로 태어난 것
2.아테네 시민으로 태어난 것
3.소크라테스를 스승으로 모신 것 이었다.
현재 목회자와 교육자들은 생각해보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나를 목회자로 또는 스승으로 만난 것이 행운(자랑)이라고 말할 것 같은가? 평범한 직업인으로서 평균적 목사나 교사(교수)가 되어서는 그런 신자나 제자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남다른 사랑과 헌신, 그리고 무엇보다도 남다른 독특성이 있어야만 얻을 수 있는 보람일 것이다.
예배시간을 통해서 만난 것으로는 목회자-신자 관계가 희박하다. 교실(강의실)에서 정해진 강의만 갖고는 끈끈한 사제관계가 생기지 않는다. 공식적 업무수행 이외의 상담이나 사랑(관심)을 나누는 인간적 만남, 투자와 희생 등 비업무적, 반계산적 베풂(service)이 있어야 연결고리가 생긴다. 그래서 학생은 많되 제자는 드물고 교사는 많되 스승은 귀하다고 하는 것이다.(經師易求 人師難得)) 머리로만 만나서는 관계가 차가와진다. 가슴으로 만나야 온기가 돌고 영혼으로 만나야 더욱 풍성해진다.
나의 사망소식이 보도됐을 때 목회나 교육에 종사한 햇수(年數)에 따라 최소한 한 해에 1명씩 즉 30년 목회(교육)했다면 30명 정도만 나의 정신을 나누어가진 신자(제자)들이 나타난다면 성공한 목회자요, 훌륭한 교육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을 기르기도 어렵고 존경할 스승이나 목회자를 만나기도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만남의 축복이 소중하다는 것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