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안에서 사모님으로 불리는 목회자의 부인은 과연 어떤 위치인가? 어떻게 해야 모범적인가?
누구나 신분, 호칭, 위치, 임무가 불분명하면 불안하다. 진퇴양난 즉 죽자니 청춘이요, 살자니 고생이기 때문이다.
목회자 부인도 인간이다. 뿐만 아니라 여자다. 그리고 아내이고, 어머니다. 교회 안에서 신자이기도 하다. 평범한 인간으로, 여자로, 아내로, 신자로 대해주기를 바란다. 너무 미화시켜 실수에 대해 옹색하게 몰지도 말고 너무 깐보고 무시해 힘들게 하지도 말기를 바란다. 그냥 있는 그대로 봐주면 좋겠다. 키가 크면 큰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예쁘면 예쁜 대로, 미우면 미운 대로 참아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 다음 글을 천천히 읽어보자.
“아버지와 아들이 당나귀를 팔러 가는데 사람들이 한 마디씩 던진다. 아무도 당나귀를 타지 않고 끌고 갔더니 미련하다고 하고, 아들을 태웠더니 ‘불효자’라고 아들을 욕한다. 거꾸로 아버지가 탔더니 이번엔 자식을 걷게 하는 ‘나쁜 아버지’라고 매도한다. 결국 부자(父子)는 당나귀를 메고 갔다.”
사모는 스트레스를 받는 자리다. 뭘 해도 고운 소리를 듣기 어려운 사모의 모습이 위 우화 속 부자(父子)와 같다.
사모들의 입장에 대한 고훈 목사의 생각을 소개한다.
“방정(方正)하면 건방떤다하고, 정숙하면 내숭떤다 하고, 청빈하면 궁상떤다 하고, 많이 배우면 목사 앞서 간다 하고, 적게 배우면 무식하다 하고, 눈물 흘리면 질질 짠다하고, 웃고 있으면 무게 없다하고, 절약하면 인색하다하고, 넉넉하면 헤프다하고, 심방동행하면 설친다 하고, 동행 안하면 주의 일 무관심하다 하고, 자녀를 잘 키우면 자기자식밖에 모른다고 하고, 잘 못 키우면 모범되지 못한다 하고, 교회 성장하면 교만한 사모라 하고, 교회 성장 안 되면 내조 잘못해서 그렇다 하고, 병들면 목사 가시라 하고, 건강하면 제 몸만 챙기는 사모라 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겠는지 좋은 방안을 알려주기 바란다. 교회가 원래 ‘언어 사회’이기 때문에 말이 많은 곳이다.
“태초에 말씀(Logos)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요 1:1)
이렇게 교회 조직과 신앙생활은 ‘말씀’으로 이루어지다보니 사람들도 제각각 ‘말’을 즐기는 곳이 되었다.(신 32:1, 욥 8:2, 시 19:4, 54:2, 78:1, 잠 4:5, 5:7, 6:2, 7:24, 8:8, 18:4, 전 10:12-13, 겔 3:17, 33:7, 호 6:5, 8:9)
그러나 말에는 양면성이 있다.
덕을 세우고 용기를 줄 수도 있지만 (시 39:2, 잠 12:25, 15:26, 16:24)
공동체를 깨뜨리고 남의 가슴에 상처를 줄 수도 있다. (느 6:13, 마 5:11, 벧전 3:10)
교회생활과 가정생활은 어느 정도 격리, 보호되어야 좋다. 그러나 많은 경우 목회자의 가정생활은 교인들에게 그대로 노출된다. 자연적으로 사모와 자녀들까지 산 위의 정자처럼, 등경 위의 등잔처럼 그대로 보이는 것이다.
게다가 기대수준이 높게 돼있다. 목회자는 변소도 안 가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하늘에서 내려온 하나님 전권대사처럼 가르치고 배우다보니 보통사람과는 DNA가 다른 특별인간으로 생각한다. ‘하나님의 종님’ ‘하나님의 사자(使者)’ ‘기름 부운 종’ 등 숱한 미사여구를 동원해 하나님과 동일시한다. 목회자 자신도 그러하고, 오래 믿고 잘 믿는다는 사람들의 기도에서도 그러하다.
그러나 이것이 올무가 되고 부메랑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이다. 너무 거룩하게 위상을 정해놓다 보니 경외심을 느끼는 것까지는 좋은데 자칫 조그만 실수나 흠이 생겼을 때 이해, 용납, 용서하는 품이 아주 협소해지는 것이다.
이제 목회자와 사모를 인간반열로 내려놓아 우리 평범한 교인들과 같은 자리로 모셔야 한다. 구름타고 다니며 이슬만 먹고 사는 신선이 아니라 낮에 일하면 밤에 쉬어야 되는 존재요, 공적 생활이 끝나면 하나의 아버지요, 남편이요, 인간으로 살 수 있게 보호해야 한다.
24시간 내내 전화하면 안 되는 것이요, 아무 때나 예고 없이 찾아가도 안 되는 것이다. 목회자가 이럴진대 그 사모 또한 보호받고 이해받아야 할 하나의 인간이요, 여자요, 아내요, 어머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된다.
나이 드신 권사님이 모피코트를 입고 나올 때 그것을 부러워할 수 있는 것이고, 부유한 집사님이 다이아몬드 반지를 자랑할 때 눈 여겨 보면서 한 번 껴봤으면 하고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남편인 목사가 여자 청년들이나 성가대원들과 친절하게 대화하고 즐겁게 웃고 있을 때 먼발치에서 조금은 신경 쓰일 수 있음을 이해해야 된다.
교인들이 목회자의 설교에 대한 평가를 화제로 삼았을 때 못 들은 체 하지만 귀를 쫑긋 세우고 듣게 되는 자리이다. 교인들이 초대하여 맛있는 식사를 대접하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호의로 베풀어주는 선물들이 고맙지만 항상 빚 진자의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받는 것이다. 왜냐면 돈이든, 물건이든 준 사람은 항상 그것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자기가 베푼 것이나 외상 값 받을 돈을 잊어버리는 일은 거의 없다. 항상 친절하게 대하고 자주 왕래하며 무엇인가 도와준 사람들 입에서 좋은 말이든, 나쁜 말이든 말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근거리에 있는 사람이 두려운 것이다.
국민의 절반은 임금님 욕하는 재미로 산다는데 목회자와 사모가 어찌 무사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들도 사람이요, 장·단점을 함께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제발 숨 좀 쉬고 살게 도와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