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반”(막 7:11-13)이란 말은 ‘제물’이란 히브리말을 헬라글자로 바꿔 소리 나는 대로 적은 것이다. 하나님께 바친 것이니 다른 데 쓸 수 없다(레 1:2, 민 7:13)는 뜻이 있는데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이 자기들의 부모님에게 효도를 하지 않는 핑계거리로 이 말을 사용하다가 예수님께 책망을 들었던 내용이다.
율법의 근본정신을 망각한 채 글자에만 집착하면서 자기들의 불효를 정당화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열심을 다하느라 부모님을 섬기지 못했다고 이유를 대는 못된 신앙인들에게 주는 교훈이다.
‘見肢忘月’ 즉 달 보라고 손가락질 했더니 달은 안 보고 손가락만 보고 있는 것이다. 이들에게 주고 싶은 충고가 있다.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맬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푼다.(마 18:19-20) 보이는 부모도 제대로 섬기지 못하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사랑한다는 것은 논리상 어불성설인데 교묘한 핑계거리만 찾아낸 것이다.
하나님은 제단에서 예배드리려 하다가 형제자매간 불화한 일이 있었으면 제물을 그대로 두고 먼저 가서 세상적 인간관계를 평안하게 해결하고 다시 와서 예배드리라고 하셨다. 하나님 섬기는 수직적 신앙보다 부모형제 사랑하는 수평적 신앙을 먼저 챙기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어린 예수님은 키도 성장했고(신체적 성장) 지혜도 자라났으며(인지적 성장) 하나님께 사랑받고(신앙적 성장) 동시에 인간들에게도 사랑스러웠다(눅 2:52)고 하였다.
하나님사랑 못지않게 인간들의 사랑과 존경도 소중한 것이다. 구약 아하스통치 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종교적 혼란과 정치적 부패로 타락하였다. 하나님 공경과 예배를 물질적 척도로 계산하고 있었다. 높이 계신 하나님만 바라보았지 현재 내 안에서 나와 동고동락하는 임마누엘 하나님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번제물을 드리고 천천의 숫양과 만만의 기름을 드리며 맏아들을 바치려고 헌물경쟁을 벌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높은 곳에 따로 계시고 싶지 않으셨다. 우리 곁에 바싹 내려와서 나란히 동행하며 함께 살고 싶어 하셨다.
그래서 正義를 행하며 仁慈를 사랑하고 겸손하게 同行하는 것(Do what is fair and just to your neighbor, be compassionate and loyal in your love, and don't take yourself too seriously-take God seriously : 미가 6:6-8)을 원하신다고 말했다.
예수님께서도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fairness) 긍휼(compassion) 믿음(commitment) 같은 절대 진리(the absolute basics)를 버렸도다.(마 23:23)라고 꾸짖으셨다.
자 이제 우리 신앙계의 지도자들(목회자와 장로들)도 하나님을 핑계 삼아 부모에게 불효하고 지역사회에 등 돌리는 이상한 일을 하지 말아야겠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우리나라는 음력 8월 초하룻날을 전후하여 조상들의 묘소를 찾아 벌초(풀 깎기)를 한다. 각지에 흩어져 살던 여러 후손들이 함께 모여 공동 작업으로 이 일을 하면서 같은 일가친척임을 확인하고 노동을 공유한다. 어떤 이는 돈으로 부조를 하고 어떤 이는 선물을 준비하며 어떤 이는 몸으로 노동을 제공하고 어떤 형제는 뒷정리와 점심을 산다. 이런 집안 형제들의 공동 작업에 목회자들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신앙을 핑계 대는 것이다.
참여 못하는 데 대해 마음속으로 미안한 생각도 없이 아예 그런 일이 있는 줄도 모른다. 하늘에서 혼자 떨어진 듯한 태도이다. 그렇게 하기 때문에 가까운 친척들 일수록 전도하기가 어렵다.
“너나 잘 믿고 잘 살아라”
는 생각이 나도록 비협조적이기 때문이다. 하나만 알았지 둘은 모르는 것이다. 이렇게 사는 자는 자녀결혼식이나 부모 초상 때도 알리지 말고 혼자서 큰일을 치룰 것인가 묻고 싶은 마음이다.
현대판 “고르반”(Corban)을 주장하는 것이기에 예수님으로부터 책망 받을 행태인 것이다. 일가친척 중에 아직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더 사랑하고 섬기며 아껴주고 집안공동체의 대소사와 고향동네 애경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동고동락해야 할 것이다.
명절이나 부모의 추도일 또는 생신 때에도 교회 일로 핑계거리만 있으면 그걸 이유로 참여하는 일을 소홀히 해버린다. 교회에 일이 있거나 주일 또는 수요일이 걸려있으면 딱 좋은 핑계거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떳떳한 것이다. 조금도 미안한 생각 없이 공동체에서 이탈해버린다. 이렇게 해서 어떻게 신앙이 좋은 것임을 알릴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예배드린다는 핑계 삼아 형제자매에게 불충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차라리 나에게 불충하더라도 당장 네 옆에 있는 부모, 형제를 먼저 사랑하고 섬기라”고 하실 것이다.
그러기에 신앙지도자들이 선교할 기본적 분위기를 마련하는 데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있다. 믿지 않는 자보다 나을 게 없고 어느 면에선 한 수 더 뜰 정도로 자기편의 적이다.
찢어진 문틈으로 내다보면서 이웃집 문 바르라고 외치면 그들이 뭐라고 할까? "당신네 문이나 잘 바르라"고 하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