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섯 살짜리 어린아이가 목욕탕에 앉아 대야에 물을 담그며 놀고 있었다. 아이는 물이 담긴 대야를 들고 아빠에게 갔다.
“아빠, 내가 물 떠왔어. 이걸로 세수해.”
“영호야, 발 담근 물로는 세수하는 거 아니야.”
“왜?”
“발 담근 물을 더러우니깐 그렇지!”
“아빠, 그럼 이 물은 더러운 거야?”
“응, 더러운 물이야. 발을 담근 물이니까.”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야에 있던 물을 바닥으로 쏟아버렸다. 잠시 후 아이는 아빠를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아빠가 너무 이상했다. 아빠는 여러 사람들이 발을 담그고 있는 목욕탕 속에 앉아서 그 물로 얼굴의 땀을 씻어내고 있었다.”
認識이 우리의 삶을 설명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인식자체가 眞理가 되는 건 아니다. 버스나 배로는 철로 위를 달릴 수 없다. 우리 마음속에 한번 철로를 깔아놓으면 그 위를 달릴 수 있는 건 오직 기차뿐이다.
◎ 아이들에게 우산이 어디에 사용되는지 물었다. 첫 번째 아이는 ‘비를 가릴 수 있다’고 말했다. 두 번째 아이는 ‘지팡이로 쓸 수 있다’고 말했다. 세 번째 아이는 ‘무기로도 사용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그때 방긋 웃으면서 케이크 위에 장식용으로 쓰는 손가락만한 종이우산을 펴보였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이 우산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첫 번째 아이는 아무 말이 없었다. 두 번째 아이도 별다른 말이 없었다. 세 번째 아이도 아무 말이 없었다, 존재하는 것들은 결코 하나의 의미로만 설명 될 수가 없다.
◎ 잠자리 한 마리가 풀 위에 가만히 엎드려 잠을 자고 있었다. 한 아이가 살금살금 다가와 있는 힘을 다해 잠자리채를 휘둘렀다. ‘윙’하고 바람 갈라지는 소리에 잠자리는 날개를 폈다. 가까스로 죽음을 모면한 잠자리가 아이를 향해 말했다.
“나에게 날개가 없었다면 어린 너에게 잡힐 뻔 했구나.”
그런데 그 말을 하는 순간 잠자리는 온몸을 뒤틀며 고통스러워했다. 아이에게 말을 하다가 그만 거미줄에 걸리고 만 것이다. 파르르 날개를 떨고 있는 잠자리를 보며 이번엔 거미가 말했다.
“너에게 날개가 없었다면 이렇게 거미줄에 걸리지는 않았을 텐데. 아무리 발버둥 쳐도 소용없어. 움직일수록 더 조여 올 테니까.”
거미가 이렇게 말하며 재빠른 동작으로 잠자리에게 다가갔다. 그 순간 산새 한마리가 허공을 가르며 총알처럼 날아왔다. 산새는 표적처럼 박혀있던 거미를 낚아채어 물고 갔다. 신음하는 거미에게 산새가 말했다.
“거미야 미안해. 네가 그렇게 빨리 움직이지만 않았어도 나는 너를 보지 못했을 거야.”
우리들은 부족함 때문에 오히려 행복할 수도 있고, 재주가 많아 반대로 올무가 될 때도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삶은 이렇게 단순논리로만 이해될 수 없기 때문이다.
◎ 세상에 돈만 있으면 안 되는 일이 없다고 말하는 친구가 있었다. 그와 함께 문방구 앞을 지난 적이 있다. 옆구리 구멍에 동전만 넣어주면 거꾸로 세월을 달릴 줄 아는 플라스틱 말(馬)이 조롱하듯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친구는 500원짜리 동전을 옆구리구멍에 넣고 80kg이 넘는 거구를 말위에 실었다. 말은 동전을 먹고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친구에게 말했다.
“거봐 돈으로 안 되는 것도 있잖아.”
친구는 겸연쩍게 웃으며 혼자서 출렁이다가 자기 입으로 말소리만 몇 번 내고서 조용히 말 등에서 내려왔다.
◎ 한 젊은이가 전봇대에 구인광고(求人廣告)를 붙이며 바쁘게 지나갔다. 잠시 후 길을 지나가던 한 사내가 진지한 얼굴로 구인광고 앞에 발을 멈추었다.
며칠 후 구청에 임시로 고용된 노인들이 물젖은 솔로 전봇대의 구인광고를 벗겨냈다. 깨끗해진 전봇대를 확인하러 구청직원이 다녀갔다. 종이 한 장이 이토록 많은 사람을 먹여 살린다. 종이 한 장을 놓고 여러 사람들의 삶이 힘겹게 매달린다. 한 장의 종이도 예사롭지 않은 세상이다. 지금 우리들은 얼마나 힘겨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가?
위의 일화들은 이철환이 쓴 「연탄길」 : 가슴 찡한 우리 이웃들의 이야기 속에 삽화처럼 들어있는 이야기들이다.
사람들은 지금까지의 경험과 공부에 의해 나름대로의 추측과 예단(豫斷)을 갖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것이 항상 맞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다른 이의 의견도 참고해가며 자기 수정을 해야한다. 지금까지는 이러했는데 앞으로는 저러할 수도 있고 여기서는 이러했는데 저기서는 저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북반구에서는 남향집이 좋지만 남반구에 가면 북향집이 좋고 한국 차들은 왼쪽에 핸들이 있지만, 일본차들은 오른쪽에 핸들이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 우리와 같이 살던 목수(요셉)의 아들이 아니더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냐? 예수님이 공생애(公生涯)를 시작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를 어릴 적 모습 즉 ‘나사렛의 목수아들’로만 대하려고 했다. 그래서 선지자들이 본 고향에선 대접받지 못한다는 말이 나왔다.
우리들도 자녀에 대해, 젊은이들에 대해 기존의 편견이나 고정관념에 매달리지 말자. 한번 형성된 지식에 너무 집착하지 말자. 세상은 계속 변하고 있고 내 지식은 어느 한계 안에서만 유효한 것이다.
진화(evolution)하지 않으면 혁명(revolution)을 당할 수 있다. 그래서 개혁과 개선은 항상 지혜로운 자의 자기 보존방법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