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이 지났어도 십자가의 도는 여전히 유효하다.
“갈보리산 위에 십자가 섰으니 주가 고난을 당한 표라.
험한 십자가를 내가 사랑함은 주가 보혈을 흘림이라.
험한 십자가에 주가 흘린 피를 믿는 맘으로 바라보니,
나를 용서하고 내 죄 사하시려 주가 흘리신 보혈이라.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
“주 십자가 못 박힘은 속죄함 아닌가
그 긍휼함과 큰 은혜 말할 수 없도다.
늘 울어도 그 큰 은혜 다 갚을 수 없네.
나 주님께 몸 바쳐서 주의 일 힘쓰리.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맘에 큰 고통 사라져 오늘 믿고서 내 눈 밝았네.
참 내 기쁨 영원하도다.”
바울 사도의 신앙선언은
“내게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말고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세상은 나에 대해서 죽었고 나는 세상에 대해서 죽었다.” (갈 6:14)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것, 하늘의 것, 그리고 만물이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올 길을 정해 놓으셨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화해의 길을 열어 놓으셨다.” (골 1:20)
“십자가의 도가 멸망할 사람들에겐 어리석은 것에 불과하지만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 1:18)는 것이었다.
고난주간이 지났어도 예수님의 架上七言을 다시금 상고해보자.
예수의 神性을 나타내는 처음 3말씀과 人性을 나타내는 후편 4말씀을 분석해보면
① 용서의 십자가 : 잔악한 원수를 용서하는 말씀 (눅 23:34)은 구약 (사 53:12)에 예언된 그대로다. 제사장으로서 불쌍하고 무례한 가해자 인간을 용서 해 달라는 중보기도이다(용서).
② 구원의 십자가 : 회개하는 죄인에게 소망과 구원을 주는 말씀 (눅 23:43)으로 구약 (사 52:10-11)에 예언돼 있으며 제사장으로서 용서의 선언을 하셨다(권위).
③ 효도의 십자가 : 불쌍한 신자(가족)에게 힘을 주는 말씀 (요 19:27)으로 구약 (출 20:12)에 예언된 것이며 제사장으로서 깊은 가족애의 말씀이다(기억).
④ 고난의 십자가 : 예수님의 내면적 고통을 나타내며(마 27:46, 막15:34) 구약(시 22:1-2)에 예언된 말씀이다. 제사장으로서 내적 고통을 울부짖으신 것이다(순종).
⑤ 생수의 십자가 : 예수님의 육신적 고통을 표현한 말씀(요19:28)으로 구약(시69:21)에 예언된 대로다. 예수님의 인간적 고통을 표현한 것이다(수난). 4번과 5번 말씀은 예수님의 인성을 나타내며 우리와 똑같이 내면적으로나 외면적으로 당하는 모든 고통을 먼저 직접 경험하신 것이다.(수난).
⑥ 완성의 십자가 : 지금까지 추진 해오신 인간 구원의 대사역을 다 이룬 것을 선언하는 완성의 확인 (요 19:30)이었다. 구약(시22:31)에 예언되어있다. 제사장으로서 사명완수를 선언 하신 것 이다(승리).
⑦ 소망의 십자가 : 예수님은 죽음 이후에 전개될 미래의 소망과 영광을 선언하신 것이다 ( 눅23:46). 구약 ( 시31:5)에 예언된 대로 제사장의 마지막 축복선언까지 하신 것이다(확신). 마지막 두 말씀으로 예수님의 승리를 선언했다. 죽음 이후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품에 완전히 의탁할 수 있음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를 알려준다. 탕자가 마지막 한계상황에 부딪혀 더 이상 나갈 길이 없을 때 고향에서 몽매에도 잊지 않고 기다리고 계시는 아버지의 품을 생각해낸 것이 축복이었던 것과 같다.
골고다산에는 세 종류의 십자가가 서있었다.
가운데에는 구원의 주체이신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고 오른편에는 구원받은 강도의 십자가가 서 있으며 왼편에는 끝까지 구원의 기회를 외면한 채 버림받은 강도의 십자가가 있었다. 똑같은 강도였지만 십자가 앞에서 두 갈래 길로 나뉘어졌다.
십자가 주변에는 세 종류의 인간무리가 서 있었다.
①예수님을 팔아먹은 가룟유다와 당시의 제사장 같은 종교지도자들이 서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예수님을 힘들게 하고 슬프게 하는 자들은 교회 안에 있고 자칭 신앙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 중에 있음을 예고한 것 같다.
② 예수님과의 관계를 의도적으로 부인하면서 그의 희생을 모른체 하는 베드로와 군중들,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며 신음하는 예수님 옆에서 그 옷을 차지하려고 제비나 뽑고 있는 이해타산의 군인들이 있었다.
③ 그리고 양심적으로 잘못된 줄 알면서도 면책의 핑계까지 붙이며 오판을 내리는 빌라도 같은 법조인들이 있었다. 오늘날도 이런 종류의 인간들이 신앙 안 밖에 상존하고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는 “유대인의 왕 나사렛 사람 예수”라는 명패가 붙어있었는데 히브리말과 로마말 그리고 그리스말로 적혀있었다. 히브리어는 종교적 언어로 예수님의 무죄와 신앙적 지도자임을 확인해주었고 로마어(라틴어)는 정치적 언어로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요 통치의 최고 권위자임을 표현 한 것이며 그리스어(헬라어)는 문화적인 언어로 예수님은 전 세계 모든 문화의 근거임을 나타낸 것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 옥상과 실내에 십자가를 게시하고 네온사인으로 장식해 놓았지만 그 십자가의 수난과 의미를 가슴에 새기고 있는지 궁금하다. 많은 신앙인들이 십자가 목걸이를 걸고 많은 목회자들이 십자가 뺏지를 달고 있지만 이토록 고통과 인내가 스며있는 십자가로 느끼고 있는지 모르겠다. 바울사도는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게 없다고 했건만 우리들은 십자가 대신 세상적인 것, 돈이나 지식이나 지위를 자랑하지 않았나? 교회크기나, 교인 수, 박사학위나, 교단 내 직책들이 자랑거리로 생각나지는 않는지 모르겠다. 불속에 넣으면 모두 타 없어질 것들에 착념하다가 부잣집 문 밖에서 구걸하던 나자로를 바라보며 물 한 방울을 애원하는 불쌍한 부자의 처지에 빠지지 않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