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하지 않는 고난
작성자
김*태
작성일
09.12.21
조회수
1952

기독교에서 가장 큰 절기는 성탄절과 부활절이다.
부활절은 우리 문화에서는 생소하지만 서구에서는 부활절 방학과 휴가가 있을 정도로 큰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부활절을 맞이하려면 그 전에 40일 동안 주의 고난을 기념하는 사순절이 있어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진리를 놓치기가 쉽다. 사순절 없는 부활은 있을 수가 없다. 땀 흘리지 않고 열매를 거둘 수 없고 아픔 없이 성숙할 수 없듯이, 고난 없는 영광은 기대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사순절은 기독교에서만 지키는 절기가 아니라, 인생 속에서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으므로 근본적으로 고난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인생에서 왜 고난이 필요한가? 또 그러한 결과로 어떤 영광이 나타나는가? 사순절이란 열 순(旬)자를 써서 “40일”이라는 뜻으로 성경에서는 그 수가 고난과 갱신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모세는 40일 금식을 통해 십계명을 받았고,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40년을 방황했고, 주님은 40일을 금식하셨고 또 부활에서 승천까지 40일이 걸렸다.
기독교는 고난의 의미인 ‘40’을 빼 놓고는 생각할 수도 없듯이 우리네 인생도 고난을 빼 놓고는 내일의 꿈과 영광이란 무지개에 불과하다. 우리네 인생은 거친 파도를 헤치며 전진하는 조각배처럼 끊임없이 세파의 도전을 받으며 살아간다. 그 상황에서 완전한 자란 아무도 없다. 다만 아슬아슬하게 폭풍이 지나가길 바라며 기도할 뿐이다. 의미 없는 아픔은 없듯이 고난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겨나갈 때의 승리의 면류관이 기다린다는 확신이 있기에 고난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정진하는 것이 인생이 아니겠는가.

고난은 분명 고통스럽지만 그것이 인생에서 꼭 필요한 이유는 첫째로 고난은 자신에 대해 눈을 뜨게 하기 때문이다. 냉동기술이 발달되지 않았을 때, 어부의 최대 관심사는 청어를 싱싱하게 운반하는 일이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런던에 도착해보면 다 죽어있었다. 그런데 한 어부는 산채로 비싼 값에 팔아 큰 재미를 보았는데 알고 보니 메기를 청어 안에 넣어두면 죽지 않으려 열심히 도망 다닌 것이 싱싱함을 유지했던 비결이었다.
사람들은 편한 것을 좋아하지만 인생에서 고난과 긴장감이 사라지면 그 때부터 삶의 백태가 끼기 시작하여 장래가 불투명하여 두려움 속에 부정적인 사람이 된다.

유안진님의 ‘내가 나의 감옥이다’라는 시를 보면 자신은 한 눈 팔고 사는 줄은 알았는데, 알고 보니 두 눈 다 팔았다는 것이다. 다른 것은 다 보면서 정작 무엇이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게 했단 말인가. 인간은 너무나 우매하여 고난이 아니고는 자기를 돌아볼 줄 모르기에, 신은 고난을 통해 자아를 바라보게 하므로 자연히 이웃과 신을 바라보게 하신다.
어떤 분은 사업이 부도나고 남편이 구속되고 가정이 파탄되면서 자신을 찾았다고 고백했듯이 어리석은 인간은 아픔을 통해서 비로써 자기를 성찰하기에 고난이 삶에 필요한 것이다.

둘째는 고난은 전진의 기회가 되기에 필요하다. 우리는 나이 마흔이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한다는 말을 한다. 그 나이에 얼굴이란 외모가 아니라 그 사람의 삶 자체가 멋과 향을 풍기면서 얼굴을 만들어 주기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40’이란 숫자 자체가 고통이 아니라 그 때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장애물이 있었던가. 수많은 풍파와 폭풍이 덮칠 때 자신은 죽어가면서 가정과 이웃은 사는 시간이 되었기에 40의 고난은 오히려 축복이 되었던 것이다. 아니 고요한 바다만 항해하는 배란 이제껏 만난 적이 없었다. 니체도 인생의 기쁨은 오히려 고난 속에 있다고 했듯이, 풍파들이 있었기에 전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보통 선수들이 큰 대회를 앞두고 40일 전지훈련을 갖는 데는 나름대로 과학적 근거가 충분하다. 이 기간에는 축적되었던 에너지를 다 방전시키고 다시 재충전시키는 데 훈련과정에서 에너지가 연소되면서 생겨나는 고난 지수를 세포들이 다 기억하고 실전에 몸을 방어하는 능력을 배가시켜 좋은 성적을 얻게 한다는 것이다. 내 자신도 운동을 하면서 그것을 늘 경험하고 있다. 땀을 많이 흘릴수록 기록도 좋아지고 몸도 더 많이 가벼워짐을 느낀다. 우리 인생은 장거리 마라톤과 같다. 움츠려지면 질수록 고난지수가 낮아 전진할 힘이 없지만, 힘이 들어도 고난지수를 자꾸만 높여나가면 순풍에 돛을 달듯이 더 빨리 나갈 수가 있다.

고난은 이렇게 자신을 찾고 또 장거리 인생에 큰 힘을 얻게 한 후, 영광된 미래가 기다리기에 필요한 것이다. 부활절은 반드시 사순절이 지나야 온다. 드라마를 보는 사람이 아니라 주인공이 되는 길은 십자가를 지고 사순절적인 고난의 삶을 살아가야만 부활의 영광은 자신의 것이 될 수가 있다. 고난은 분명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과목이지만, 그 과정을 통과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헛된 욕심이 사라지면서 자아가 보이고 미래가 보이고 그리고 면류관의 주인이 되게 한다. 우리가 위대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돈이 많거나 지식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모두가 이 과정을 잘 이수했기 때문이다.

욥은 말할 수 없는 고난을 겪었지만 단련 후에 정금같이 나아가 이전과 비할 수 없는 영광된 삶을 경험하게 되었다. 바울도 그랬고, 모세도 요셉도 다윗도 다니엘도 고난대학을 졸업한 영광스러운 사람들이다.
얼마 전 인터넷에 세계적인 발레리나 강수진 씨 발 사진이 올려 졌을 때, 나는 합성된 사진으로 알고 믿지 않았는데 나중에 그 사진이 진짜라는 것을 알고 할 말을 잃고 목이 메었다. 얼마나 연습을 했기에 발이 저 모양이 되었단 말인가. 김연아 양이 1%의 재능과 99%의 연습이 오늘의 자신을 만들었다고 말했듯이 누구도 고난 없는 성공이란 있을 수가 없었다. 무대 위에서 공연하는 모습은 화려하지만, 그 배후엔 이렇게나 고통의 시간들이 있었음을 망가진 발이 큰 소리로 증언해 주는 듯 했다. 그러므로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말은 누구나 최선을 다한다면 꿈은 현실 속으로 인도하기에, 오늘도 생의 마지막 순간에 간절히 원했던 것을 어렵지만 지금 실천하는 사람이 영광스러운 내일을 맞이할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고난과 행복은 쌍둥이>

삶이 힘들게 느껴지는 청년이 있었다. 자신에게는 고난과 아픔만이 반복된다고 생각한 그는 행복해지는 방법을 찾아 나섰다. 먼 길을 묻고 물어 마침내 행복을 나누어주는 노인이 살고 있다는 산을 찾을 수 있었다. 산 속 오두막집 앞에서 신비감이 느껴지는 한 노인이 앉아서 무언가를 산 아래로 던지고 있었다.

“저는 행복을 나누어주는 분을 찾아 왔습니다. 그런데 던지고 있는 그것이 무엇입니까?” 청년이 묻자 노인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것 말인가? 이것 행복이라네.”

청년은 다가가, 크기가 각기 다른 동그란 그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그런데 노인의 말과는 달리 그 동그란 것에는 각각 고난, 아픔, 시련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아니, 이건 행복이 아니라 고난, 아픔, 시련이지 않습니까?

노인은 웃으면서 ‘고난’이라고 적힌 것을 하나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그것의 껍데기를 벗겨 내었다. 그랬더니 그 안에는 ‘행복’이라는 두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어떤가? 겉에는 ‘고난’이라고 적혀 있지만, 실제로 이것의 이름은 ‘행복’이라는 것이네. 행복은 양파 같은 것일세. 신은 인간에게 그냥 통째로 행복을 주는 경우는 없네. 겉보기에는 고난, 아픔, 시련으로 적혀 있지만 그것의 진짜 이름은 행복이지.” 행복을 주는 노인을 계속 말했다.
“나는 요즘 심히 걱정되는 일이 있네. 인간들은 내가 던지는 행복을 겉모습만 보고 고난, 아픔, 시련이라고 믿어 이걸 보지도 않고 그냥 내던져 버린다는 것이네. 신은 왜 내게 행복은 주지 않느냐고, 이런 것만 주냐고 불평만 해대는 것일세. 참 한심한 일 아닌가?”

깨달음을 얻은 청년이 산에서 내려가려고 하자 노인은 이렇게 당부하였다.
“잊지 말게. 고난, 아픔, 시련과 행복은 알고 보면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말일세. 우리가 ‘행복’의 겉에 고난, 아픔, 시련으로 적어서 주는 이유는 ‘행복’을 가질 자격이 있는지 시험해 보기 위해서라네.”



이 글은 피러한이 CM메세지 2008년 3월호에 기고한 것입니다.

2008. 3. 17
총장 김 형 태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