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인간세계인 에덴동산에는 영적 선택을 위한 두 가지의 상반된 메시지가 존재하였다.
하나님께서 그 동산에 보기에도 아름답고 먹기에도 좋은 나무들을 나게 하시면서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게 하셨다. 그리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고 일러주셨다.
그러나 가장 간교한 존재가 여자(하와)에게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고 포괄적인 함정질문을 던졌다. 하나님께서는 다 먹되 선악과만 먹지 말라 하셨건만 간교한 자는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더냐? 는 물음으로 “아니다”라는 대답이 나오게 유도심문을 하고 있다.
“아니다. 다른 나무의 실과는 먹을 수 있으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하셨다고 답했다. “먹지 말라”는 단순명령에 “만지지도 말라”는 말을 추가해 보탰고, “정녕 죽으리라”고 단언했는데 “죽을까 하노라”고 반신반의하는 대답을 하고 있다.
이에 간교한 자가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강력한 반론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될 줄을 하나님이 알기 때문이다.”라고 유혹했다.
지금까지 쳐다보지도 않던 선악과였지만 간교한 자의 말을 듣고 난 후 다시 쳐다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지라” 유혹에 동의할 준비가 이렇게 척척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고, 먹지 말라면 더 먹고 싶은 본능적 충동이 인간 속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제 누구 말을 들을까? 만 남아있다.
①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과
②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는 마귀의 발언이 동시에 내 앞에 주어져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하고 분명하다. 조건도 없고 부연설명도 없다. 명쾌한 선언으로 되어있다. 원래 진실은 긴 말이 필요 없고 간단명료한 법이다. 그러나 마귀의 유혹은 화려한 꾸밈이 있고 약속이 있으며 보상도 주어진다. 진술도 길고 매력적이다. 독버섯이 더 화려하고 독초가 더 예쁜 꽃을 피우는 것과 같다. 그 옛날 에덴동산에서는 인류의 운명이 갈라지는 절대 절명의 순간이 이렇게 주어지고 있었다.
새로 뽑힌 지도자에게도 정치적 선택을 위한 두 가지 서로 다른 충고가 주어지고 있다.
누구 말을 들을까? 솔로몬 왕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위를 계승하자 솔로몬의 핍박을 피해 애급으로 망명했다 귀국한 여로보암이 경쟁자로 등장하였다. 르호보암이 정권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기로에 서있을 때였다.
① 연로한 충신들이 “왕의 부친이 우리에게 메운 멍에를 가볍게 해 주십시오. 왕이 만일 오늘날 이 백성의 종(servant leadership)이 되어 저희를 섬기고, 좋은 말로 대답하여 이르시면 저희가 영영히 왕의 종이 될 것입니다.”(왕상 12:7)라고 일러주었다.
그러나 ② 신진개혁파 젊은 층에서는 “나의 새끼손가락이 내 부왕의 허리보다 굵으니 내 부친이 너희로 무거운 멍에를 메게 하였으나 이제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지라. 내 부친은 채찍으로 너희를 징치하였으나 나는 전갈로 너희를 징치하겠다.”고 말하도록 일러주었다. 이에 르호보암 왕이 소장파의 충고를 따랐다. 포악한 말로 백성에게 대답하면서 원로의 가이던스를 버리고 백성들의 심중을 헤아려주지 않았다.
이로 인해 백성들의 민심이탈이 시작되었다. 우리들이 다윗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하며 돌아서기 시작했다. 그 결과 북쪽 10지파가 이탈하여 이스라엘이 되었고 남쪽 2지파만 남아 유다가 되었다.
한 지도자가 누구 말을 듣느냐에 따라 통일왕국이 남ㆍ북 왕조로 나누어지게 되었다.(왕하 12장)
우리 앞에는 항상 2개 또는 3개의 길이 제시된다. 넓은 길과 좁은 길, 하늘 길과 세상 길, 험난한 길과 평탄한 길, 나만 좋은 길과 모두에게 좋은 길 등 좌우에서, 앞뒤에서, 위아래에서 부르는 소리들이 있다.
끝까지 잘 들어보아야 한다. 그리고 잘 분별해야 한다. “우선 먹기는 곶감이 달다.”, “언 발에 오줌 누기(凍足放尿)”, “장래 떡 한 그릇보다 지금 죽 한 그릇” 등은 순간 모면이나 당장 만족의 유혹들이다. 그러나 “마지막에 웃는 자”, “끝이 좋으면 다 좋다”, “떠나는 뒷모습이 아름다운 자” 등은 인간 종점을 내다보는 영원성의 축복들이다.
「나는 지금 누구 말을 들을까?」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삶의 여정에서 순간순간마다 깊이 생각해야 할 기본 명제가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