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로 귀한 것을 얻었느냐?
작성자
김*태
작성일
09.11.02
조회수
1908


복 있는 자는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시 128:2)를 누리는 자다. 손발로 수고하여 얻은 정직한 소득으로 먹고 살며 경제적 자유를 누리는 것은 분명히 복 있는 자의 모습이다.
반대로 수고를 했어도 그 결실을 향유하지 못하면 복이 아니요, 수고하지 않은 채 먹고 살며 불로소득을 얻게 됨도 역시 복이 아니다. 도둑을 지칭하는 불한당(不汗黨)이란 말은 곧 “땀 흘리지 않고 먹고 사는 무리”란 뜻이다. 정당한 노력의 댓가를 누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1953년 소설부문 퓰리처상을 받은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는 노력했으나 그 결과를 얻지 못한 노인의 이야기로 되어있다. 쿠바의 바닷가에 살고 있던 한 노인이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으려 했지만 83일 동안이나 한 마리도 못 잡았다.
그러다 84일 째 되는 날 무려 18척이나 되는 청새치(marlin)를 만나 사흘 밤낮을 투쟁해 간신히 포획하게 되었다. 83일간 잡지 못한 것을 단번에 보충할 만 하였다. 그러나 항구로 오는 도중에 상어떼의 공격을 받아 또 한번 사투를 벌이게 되었다. 간신히 해안에 도착하여 뒤돌아보니 청새치는 뼈만 남아 있었다. 노인 어부는 무용지물인 한 마리 쓰레기 조각을 얻기 위해 90여 일이나 허비하고 말았다. 노력의 댓가를 얻지 못한 노어부의 공허하고 슬픈 손을 쳐다보자. 혹시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지?


물고기나 잡으려고 고향으로 돌아간 제자들을 찾아오신 예수님께서 진심으로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요 21:5)고 묻고 계신다.
고달픈 제자들은 “없나이다.”라고 대답한다. 오늘 우리들의 대답일 수도 있다. 여기의 “얘들아”(paidion)란 말은 “어린아이들아”란 뜻이다. 성인이 된 제자들에게는 적합하지 않은 용어인데, 어디로 갈 것인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도 모르면서 옛날의 바다로 되돌아 간 어리석고 무지한 제자들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그리스도가 없으면 우리들은 철부지 아이들과 마찬가지란 뜻이다. 또 여기에서 고기란 말도 특별히 “prosphagion”이란 말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보통 물고기가 아니라 식탁 위에 올려지는 진미 즉 값진 별미나 아주 소중한 생선을 가리킨다. 보통 물고기는 “ikthus”로 쓰였는데 여기에서만 특별한 용어로 쓰인 것이다. 그냥 한 끼 식사할 물고기가 있느냐고 묻는 말이 아닌 것이다.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은 가지는 단지 땔감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어리석은 사람들이여, 정말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나 있는가? 라고 묻고 계시는 예수님 앞에 “모르옵니다.”라고 대답해야 되는 제자들을 살펴보자. 우리들도 철없는 사람들아, 이 세상을 다 주고도 바꿀 수 없는 본질을 갖고 있느냐고 물어오시는 주님의 음성을 귀담아 들어보자. 인간들에게는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핵심요소(core value)가 있다. 생명도 그 하나다.
천하 모든 것을 다 얻어도 생명을 잃으면 그 모두가 허사인 것이다. 몇 트럭의 달걀을 가져와도 유정란이 아니면 병아리를 깰 수 없듯이 생명관리권을 갖고 있는 주님을 소유해야지 생명 없이 온 세상 모든 것을 다 갖고 누려도 그것은 허망한 것이다. 따라서 여기의 예수님 질문은 본질과 근본을 얻으라고 일러주는 사랑의 질문이요 도전인 것이다.

영과 육을 모두 지옥에 던질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해야지, 순간순간 이 세상의 지엽적인 문제로 우리를 다루는 사람들을 괘념치 말라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 말씀을 들으랴, 사람의 말을 들으랴? 내가 예수님을 기쁘게 하랴, 세상 사람들을 기쁘게 하랴? 하는 말들도 결국 순간을 얻을 것인가, 영원을 얻을 것인가? 하는 선택의 문제이다.
어느 밭에 보물이 묻혀있는 것을 발견한 사람이라면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서라도 그 밭을 사는 것이 당연하다.
구원의 도리와 축복의 근원을 알게된 사람은 이 세상 모든 것과 모든 일을 뒤로 미루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義)를 추구하는 것이다. 진짜를 본 사람은 가짜에 매달릴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