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 수
작성자
김*태
작성일
09.10.20
조회수
1922


이제 잎들도 하나씩 둘씩 뿌리가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으니 우리들도 돌아갈 내 고향 하늘나라를 생각해보자.
2008. 8. 일본의 6개 자매대학을 순방하던 중 교토에서 동지사대학을 잠시 방문했었다. 대학 경내에서 우리나라 시인 두 사람의 시비(詩碑)를 볼 수 있었다. 윤동주 시비에는 그의 유명한 서시가 써있었고, 그 옆자리에 정지용의 시비도 있었다.
1903년 충복 옥천에서 출생한 정지용 시인은 이화여대와 숙명여대 교수를 지냈고, 6・25 때 행방불명된 시인인데 옥천의 때 묻지 않은 고향 풍경을 「향수」라는 아름다운 시로 표현하여 노래로도 널리 애창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신앙인들도 여행 중 잠시 살았던 이 세상을 작별한 후 내 본향 하늘나라로 갈 것인데 그 곳은 각종 보석과 꽃으로 꾸며있고 항상 찬송과 사랑으로 충만한 곳인즉 우리도 항상 고향을 그리워하며 살고 싶지 않은가? 옛날 정지용이 생각하며 그리워했던 이 세상의 시골 풍경과 오염되지 않은 자연친화적 고향부터 먼저 살펴보자.

“① 넓은 들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는 /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곳이 참아 꿈엔들 잊힐리야 //
②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 밤바람소리 말을 달리고 /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게를 돋아 고이시는 곳 / 그 곳이 참아 꿈엔들 잊힐리야 //
③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리워 /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
④ 전설(傳說)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
⑤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 거리는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

원치 않았고 준비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부모 품과 고향집을 떠나 낯 설은 외갓집으로 피난을 떠나던 야곱은 아버지와 형을 속인 죄책감과 첫 여행길의 두려움으로 잔뜩 위축되어 있었다.
복잡한 심사를 안고 산과 들을 건너 외삼촌 라반을 찾아가다가 노숙자 신세로 돌베게를 베고 밤하늘 별을 헤아리며 외롭게 자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하늘나라 본향의 소망을 알려주셨다. 그제서야 그는 확신을 갖고 벧엘의 서약을 할 수 있었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다. 네가 누워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퍼져 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 28:17)
하늘까지 이르는 사다리의 꿈을 꾼 야곱은 땅의 이익을 추구하던 이 세상 시민에서 하늘을 향해 제단을 쌓고 예배하는 하늘의 시민으로 바뀌고 있었던 것이다.

죽음 이전만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이 세상은 혼탁해지고 각박해 지기에 죽음 이후를 생각하고 준비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이 세상은 정화되고 개선되어야 한다. 본향에 대한 그리움과 귀향은 신약성경에도 이어진다(눅 15:11-32).
아버지 품을 떠나 자기가 생각하던 자유를 누리기 위해 아저씨 집으로 갔던 둘째아들(탕자)은 자유가 아니라 부자유, 번영이 아니라 위기를 맞고 말았다. 생활이 아닌 생존수준도 보장되지 않는 극단적 벽에 부딪혔다. 절망의 순간, 누구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는 자리에서 그는 다행히 고향을 생각하게 되었다.
돌아갈 용기는 없지만 내 아버지의 집, 그리운 본향을 생각해 낸 것이다. 체면도 없고 자격도 없으며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지만, 그래도 아버지(고향)께 돌아가자고 생각한 둘째 아들의 결심이 중요한 것이었다. 도덕적 수준에서 상선필벌을 생각한 아들과 사랑의 수준에서 무조건 용서하고 기다리는 아버지의 입장은 천양지차가 있었다.

계산하는 아들과 사랑하는 아버지는 같을 수가 없다. 이 세상에서 보아도 어느 부모가 자기 자식의 양육비와 교육비와 생활비를 따져서 되받으려고 하겠나?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우리의 잘잘못을 따져서 책임추궁을 하시겠는가?
하나의 조건만 필요하다. 아버지가 계신 본향을 향하여 일어나 걷는 것만 하면 된다. 우리의 불신앙과 무지와 부족함에 대한 회개만 있으면 된다는 뜻이다. 한 해를 마무리 하면서 우리 삶의 대차대조표를 만들어보자.
받은 사랑과 도움을 수입으로 적고, 내가 섬기고 나누고 베풀고 아껴준 것은 지출로 적어보자. 수입이 많은지 지출이 많은지 잠깐 살펴보고 한 해를 정리하면서 돌아갈 내 고향 하늘나라에 대한 향수를 느껴보자.

이 세상의 낡은 옷들을 훌훌 벗어버리고 무한한 자유인으로 돌아갈 천상의 고향을 상상해 보자. 그 곳이 바로 이상향(paradeisos)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