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성과 통일성
작성자
김*태
작성일
09.10.12
조회수
1884

먼저 Alfred Benjamin의 상담예화를 소개하고 싶다. “어느 날 길을 묻는 사람에게 ‘이리 곧장 내려가시오. 네거리에 이르면 왼편으로 돌아 20m쯤 가면 빨간 2층집이 있는데 바로 그 집이오.’라고 일러주자 그는 ‘대단히 감사합니다.’라고 답례한 후 지시된 방향의 반대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Benjamin은 잘못 알아들은 것으로 생각되어 ‘여보세요. 그쪽이 아니라 이쪽으로 가세요.’라고 일깨워줬다. 그러나 여전히 ‘잘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정중히 인사한 후 계속 틀린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Benjamin은 불쾌한 마음이 들어 그를 다시 불러 세우고 ‘이쪽으로 가라고 하지 않았소?’라고 꾸중을 하였다. 그러자 ‘선생님, 죄송합니다. 저는 내일 방문할 예정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순간 Benjamin은 ‘아차!’하고 자기의 잘못을 깨달았다.

인간관계에서 대화와 이해가 그렇게 쉽지 않다. 대화가 무엇이냐? 물으니 ‘대놓고 화내는 것’이란 사람이 있다. 2008년 12월 국회의 모습을 보면 그럴 것도 같다. 그러나 진정한 대화(dialogue)는 독백(monologue)도 아니고 이중발언(dualogue)도 아니다. 진지하게 상대방의 속내와 사정을 살피고 그의 입장에서도 생각해보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이다.
같은 물건을 놓고도 입면도, 평면도, 측면도를 모두 그려보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만 부모가 자녀 심정을, 자녀가 부모 속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도 마찬가지이고, 심지어 남편과 아내도 상호이해가 가능해진다. 미술 시간에 각자 좋아하는 것을 그리라고 하니까 모두 꽃, 사람, 집, 산과 들을 그리는데 한 어린이만 검정 크레파스로 도화지 전체를 검게 칠하고 있었다. 얼마 후에 ‘장난치지 말고 너도 빨리 좋아하는 것을 그려보라.’고 하니까, ‘예, 지금 그리고 있잖아요. 저는 김을 좋아해요.’라고 대답하더란다.

어느 학교 한문시간에 “백문이 불여일견”(百聞이 不如一見)을 해석하라고 했더니 “백번 묻는 놈은 개만도 못한 놈”이라고 썼는데 선생님이 그 창의력을 대견하게 보아 50% 맞았다고 채점했단다. 어느 논술고사에서는 ‘사람이 원숭이에서 진화됐다는 사실을 언어학적 입장에서 밝히라.’는 문제가 있었는데 어느 학생의 답에 ‘사람이 중요한 실수를 해놓고 도망치는 것을 ‘꽁무니를 뺀다.’고 하고, 여자들이 지나친 아양을 떨 때 ‘꼬리를 친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원숭이에서 진화했다는 사실이 명백하다.’고 답을 썼다 한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곱다”는 말은 튼튼한 말(馬)을 보내면 상대방도 훌륭한 말(馬)을 보내온다고 해석하고,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것을 머리 좋은 사람이 여럿 모이면 배(船)도 산으로 끌고 갈 수 있다고 해석했단다. 동일한 것을 놓고도 여러 해석과 서로 다른 느낌을 가질 수 있다.
「법화경」에는 일수사견(一水四見)이란 말이 있다. 한가지의 물을 놓고도 네 가지의 견해를 갖는다는 것이다. 착한 사람이 보는 물, 악한 사람이 보는 물, 짐승이 보는 물, 물고기가 보는 물이 각각 다르다. 물고기가 보는 물은 물이 아니고 바로 집이다. 다음 글은 天然(739-842/중국 唐나라 때의 선사)의 일화이다.

어느 추운 겨울날 天然 선사가 길을 가다가 해가 저물어 혜림사라는 절에 들어갔다. 날씨는 몹시 추운데 땔감을 찾을 수 없게 되자 그는 법당에 모셔둔 나무 불상을 안고 나와 도끼로 탁탁 쪼개 군불을 지폈다. 활활 타오르는 불을 쬐며 언 몸을 녹이고 있는데 그 절의 스님이 질겁하며 달려 나왔다. “아니, 이 미친놈아! 부처님을 쪼개서 불을 피우다니 이게 무슨 짓이냐?” 그러나 天然은 태연하게 재를 뒤적거리며 말했다. “사리를 찾는 중이오.” 그 절 스님이 얼굴을 붉히며 다시 말했다. “이 미친놈아, 나무토막에서 무슨 사리가 나온단 말이냐?” “그렇다면 왜 나를 그토록 나무라시오?” 天然의 이 말에 욕설로 나무라던 스님도 말문이 막혔다는 이야기다.

오늘날의 이 세상 모습에 대하여 우리들의 보는 방법과 해석하는 입장을 살펴보라. 말단지엽만 보지 말고 본질과 핵심을 살펴보자. 혹시라도 “달 보라고 손가락질 하니 달은 안보고 손가락만 보지는 않았는지(見肢忘月)” 반성해보자. 전체를 보지 않고 부분만 보진 않았는지? 국가 차원에서 보지 않고 특정 지역 입장에서 보진 않았는지? 여당은 야당의, 야당은 여당의 입장을 얼마나 고려했는지? 한번쯤 냉정한 자기검토가 필요한 때다.
2008년을 총정리하면서 일본 사람들은 변할 변(變)자로 표현했고, 중국 사람들은 빛날 경(冏)자로 이해했고, 대만 사람들은 어지러울 난(亂)자로 압축했다. 한국의 교수신문은 호질기의(護疾忌醫) 즉 “병이 있는데도 의사에게 보여 치료받기를 거부한다.”고 표현했다. SK그룹 CEO들은 질풍경초(疾風勁草) 즉 “격심한 바람이 불고 나서야 비로소 강한 풀의 존재를 안다.”와 근고지영(根固枝榮) 즉 “뿌리가 단단해야 가지가 무성하다.”는 말을 뽑았다고 한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감사를 느끼는 사람도 있고, ‘형님 아내는 형수, 동생 아내는 제수, 자기 아내는 원수’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참교육’을 ① 진정한 교육으로 보는 이, ② 참는(忍) 교육으로 아는 이, ③ 꽉 찬(充滿) 교육으로 듣는 이, ④ 참한(gentle) 교육으로 보는 이, ⑤ 새참(間食) 같은 교육으로 인식하는 이들이 있다. 이와 같은 인간의 다양성과 통일성을 어떻게 조정할 수 있을까? 同一物의 異面性을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 사전합의가 있어야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