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의 만남
작성자
김*태
작성일
09.07.09
조회수
1853

2004년 타계한 시인 김춘수의 대표적인 시로 “꽃”이 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우리들이 보통 사람이요, 보통 몸짓이었지만 누군가를 만남으로 꽃도 되고 의미도 될 수 있다. 그래서 만남은 축복이요, 기도제목이다.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실제로 사람은 자기 혼자서 자기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을 만남으로써 자신이 누구인지를 안다” 폴 투르니에의 말이다. 베드로와 예수의 만남, 바울과 바나바의 만남, 헬렌켈러와 설리반의 만남, 강영우와 석은옥의 만남도 귀한 만남이었다. 인생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신비한 기적이면서 가장 축복 받은 만남이 될 것이다.

80세의 노구로 지쳐있던 모세는 하나님을 만남으로 구약 최고의 지도자로 40년을 살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갖고 있는 것-건강, 성품, 재능, 재물을 활용토록 원하신다. 모세에겐 지팡이를 갖고 있는 것이 가능성이었다(출 4:2,20) 디베랴 광야에선 한 소년의 한끼 식사(오병이어)가 5000명을 먹이는 기초가 되었다. 베드로와 요한은 은과 금이 없어도 가진 것(예수이름)으로 앉은뱅이를 일으켰다(행 3:6). 우리도 예수이름을 활용하자. 내 속에 예수이름을 소유하자. 예수이름으로 구원을 받고(행 4:12) 귀신을 쫓아내고(막 16:17), 기도에 응답 받고(요 14:13), 지식을 넓히자(사 11:12). 다윗이 골리앗을 이길 때도 창검이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으로 싸웠다(삼상 17:45).

우리 자신은 신비한 존재요 우주의 축소판이다. 인간의 몸은 33조의 세포로 구성돼있고, 인간의 두뇌는 140억의 뇌세포로 되어 있어 이를 다 사용하려면 234년이 걸린다 한다. 보통사람은 이 가능성의 10%~20% 밖에 활용하지 못한 채 죽는다. 인간의 내면에 이 같은 보화가 있고 능력이 잠재해 있는데 이를 알고 쓰는 사람만 성공하는 것이다. 예수를 만난사람은 가능성의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존경할만하고, 사랑받을 존재이다.

우리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로 충만한 것(요 1:14)이며, 바로 믿고 바로 활용하면 예수는 곧 우리에게 능력이요 지혜가 된다(고전 1:24). 왜냐면 예수 안에 지혜와 지식이 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골 2:3). 따라서 신앙인은 이 같은 보화들을 현실적인 힘으로 개발하고 훈련해야 한다. 우리의 지성을 예리하게 다듬고 감성을 풍요롭게 배양하며 영성을 거룩하게 훈련해야 한다. 새로운 지식을 이해하고, 암송하고, 활용하며 남에게 가르쳐 전해야 한다.

유대인들은 학교와 랍비와 교육을 중시하여 세계의 지도자를 길렀다. 감성 즉 정신력도 중요한 능력이다. 사랑, 신뢰, 소망, 열심 등은 감성의 요소들이다. 영성은 우리 인간성의 넉넉함과 거룩함을 얻기 위함이다. 바울사도는 끊임없이 자기 영성을 다듬었다. “이미 얻었다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영원한 현재진행형으로 거룩한 불만족을 느껴 항상 움직이는 영성을 소유하고 있었다.
예수의 제자들도 창조를 위한 파괴를 감행했다. 예수를 따르기 전에 생업인 배와 그물부터 버렸다. 포기가 있은 후에 새로운 헌신을 가졌다. 그리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자기의 소명과 할 일을 글로 적어 확인하는 사람들이다. 표어가 있고 생활지침이 있어야 한다. 날마다 자신을 목표 지향적으로 이끌기 위해 글로 쓴 목표가 분명하게 있어야 한다. 그가 내안에 내가 그 안에 있을 땐 무엇이든지 구하면 그대로 될 것을 믿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