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패와 비석
작성자
김*태
작성일
09.06.08
조회수
1915

이제 2008년의 전반부 6개월은 역사의 보관창고 안으로 넣어 보냈다.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흐르는 물처럼 쉬지 않고 흘러가기 때문이다.
朱子의 권학시에 “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은 이루기 어렵나니 / 조그만 시간인들 가벼이 여길소냐 / 뜰 앞 잔디밭이 봄꿈도 깨기 전에 / 계단 밑 오동잎은 가을 소리를 내는 구나”(少年易老學難成 / 一寸光陰不可輕 / 未覺地塘春草夢 / 階前梧葉己秋聲)라는 내용이 들어있다. 세월이 유수같이 흐르고 쏜살같이 지나가니 학업에 정진하라는 권면의 네용이다. “나무가 고요히 있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아니하고 / 자식이 부모를 모시려 해도 기다려주지 못하는 구나”(樹欲靜而風不止 / 子欲養而親不待)란 후회의 시도 전해온다.

성경에서도 세월을 아끼라 즉 돈을 주고 세월을 사라는 말이 있다. 모두 덧없이 흘러간 시간에 대한 아쉬움과 두려움의 표현이다. 유명한 것들 즉 명품이나 명작 또 명곡이나 명성은 모두 시간의 부대낌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꿋꿋하게 버텨온 것들의 명칭이다. 그렇다면 인간도 알뜰히 살고 영원을 추구하면 명인(名人)이나 명사(名士)가 될 수 있을까? 모든 이는 이 세상을 살았던 흔적으로 문패와 비석을 남긴다. 결국 빈부귀천 없이 균등하게 땅 한 평씩 소유하는데 귀착된다. 그래서 지혜자는 초상집과 비석에 관심을 두고, 어리석은 자는 잔칫집과 문패에 관심을 두는 것이다.

성경에 보면 969세까지 살았던 무드셀라의 생애는 한두 문장의 언급만 남아있고 겨우 33세를 산 예수님의 기록은 신구약 66권 거의 전 부에 언급돼 있다. 그렇다면 누가 더 잘 산 것 인가? 누가 더 영원에 근접하여 있는가? 살아서 자기 손으로 만들어 붙이는 문패보다 죽은 뒤에 타인들이 만들어주는 비석이 더 중요한 것이다. 인간의 낳는 방법은 하나뿐 이지만 죽는 방법은 천차만별하다. 자연사, 중독사, 전사, 정사, 압사, 소사, 익사, 자사, 역사, 실족사 등이 있기 때문이다.

30년 전 김형석 교수의 글을 보면 두 종류의 무덤 이야기가 나온다. 프랑스의 영웅 나폴레옹의 무덤과 미국의 실용주의자 프랭클린의 무덤 이야기이다. 세느강가 파리의 중심지에 있는 첨탑의 교회 밑 지하실엔 대리석으로 된 나폴레옹의 무덤이 있다. 둥근 석조실 중앙에 자주색의 대리석관이 있고 주변엔 조각상과 그의 업적을 칭찬하는 글들이 써져있고 옆방에는 그의 가족 묘실이 있다. 모두가 감탄하도록 프랑스의 영광을 표현한 황제와 장군의 묘로 꾸며졌다.

또 하나의 묘는 필라델피아에 있는 벤자민 프랭클린의 것이다. 그는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미국 독립과 건국의 공로자였다. 펜실바니아 대학의 창설자요, 인쇄술, 신문ㆍ잡지의 공로자, 저술가요 과학자와 발명가 그리고 정치가와 외교관이었다. 가난한 날품팔이로 시작해 세계적인 지도자로 성장한 그의 생애 자체가 교과서적인 것이다. 그러나 필라델피아에서 그의 무덤을 아는 이는 거의 없다. 좁은 골목길 속에 「벤자민 프랭클린의 무덤」이란 자연석 하나가 어떤 보호시설도 없이 200년을 견디어 오고 있다. 그 옆에는 똑같은 크기의 다른 사람 돌비석들이 함께 어울려 있다.

무덤이나 비석의 크기로 사람을 비교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그러나 문패의 크기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더더욱 정당하지 않다. 각 나라마다 서로 다른 문화가 있고 신앙에 따라서도 죽음과 삶의 이해가 다르기 때문이다. 꺾어서 화병에 꽂아놓은 꽃은 아무리 화려해도 내년에 다시 필 희망이 없는 것이다. 한 인간의 가치를 총평하기에는 좀 더 시간의 부대낌이 있어야 한다. 역사적 평가 작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하루를 천년같이 사는 이도 있고 천년을 하루같이 사는 이도 있다.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스스로 희생하며 고생하는 이도 있고 자기의 유익과 편의를 위해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보이든지 안 보이든지 최후에 이 모든 것을 선악 간 낱낱이 평가하는 분이 계시는 것이다. 억울하고 힘들어도 그 때를 생각하며 묵묵히 살아가는 것이 곧 신앙생활이다. 이제 6개월간의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앞으로의 6개월을 전망해보자. 한해의 반환점에 섰으니 한번쯤 중간점검이 필요한 것이다. 나의 문패와 나의 비석은 어떠할까? 내가 아는 나와 남이 아는 나 그리고 하나님이 아시는 나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한번쯤 생각해보자.